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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고교시절, 시립 도서관 한쪽 구석 책장에서 처음 접한 소설이 <공중 곡예사>인지 <뉴욕 3부작>인지, 아니면 <거대한 괴물>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그 세 책 중 한 권이 내가 처음 읽은 폴 오스터의 소설일 거다.

​폴 오스터 특유의 문체가 있다. 간결한 듯하면서도 단어와 구 사이의 연결이 유려하다. 산만한 듯하면서도 명료하고, 건조한 듯하면서도 화려하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듯하지만 사람과 삶을 사랑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미국 하위 문화와 문학, 그리고 영화와 공연을 사랑하는 작가의 감성이 묻어나온다. 그리고 언제나 빠지지 않는 야구 이야기. 그를 통해 뉴욕 메츠에 대해 알게 되었고, 야구라는 스포츠가 미국인들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의식인지 알게 되었다.

​이 소설-사실 소설이라고 단정짓기는 애매한 장르지만-<겨울 일기>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그냥 자서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는 듯 보이지만 자신의 지난 64년간의 인생을 반추한 개인적인 회고록이라 할 수도 있겠다.

​독특한 것은 이 작품의 문체다. 분명히 서술자는 전지적인 작가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의 범주에서 봤을 때 이 소설의 시점은 분명 3인칭(전지적 작가시점)인데 이 서술자가 독자에게 말을 건다. 그렇다면 이것은 1인칭 시점의 특징인데... 아마도 처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 독특한 시점의 정체에 몰두하여 책에 몰입을 잘 못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시점은 3인칭이지만 서술자가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1인칭의 특색을 지닌 독특한 시점이다. 그리고 독자는 스스로 폴 오스터가 되어서 그의 인생을 엿본다. 실제론 폴 오스터 본인인 서술자가, 독자가 스스로 폴 오스터라고 느끼게끔 말하는 형식을 빌어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셈이다.

​어쨌든, 지난 작가 인생과 자신의 연애사, 가족사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은밀한 고백이다. 물론 그간 여러 작품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과거사를 드러내거나 <빵 굽는 타자기>나 ​<빨간 공책> 등의 산문집을 통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번 작품 <겨울 일기>는 온전히 폴 오스터 자신의 생에 대한 이야기다.

​마치 내 얘기처럼 은근히 공감가는 구절이 많아 몇 문장 옮겨 본다.

그럼에도,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해도 당신이 지나간 세월에서 그리워하는 것이 있다. 옛날 전화기의 벨 소리, 타자기의 딸깍거리는 소리, 병에 든 우유, 지명 타자가 없는 야구, 비닐 레코드판, 방수용 덧신, 스타킹과 가터벨트, 흑백 영화, 헤비급 챔피언, 브루클린 다저스와 뉴욕 자이언츠, 35센트짜리 페이버백, 정치적 좌퐈, 유대식 유제품 식당, 동시 상영, 3점 슛이 나오기 전의 농구, 궁궐 같은 영화관, 비디지털 카메라, 30년간 죽 써온 토스터, 권위에 대한 경멸, 내시 램블러 자동차, 널빤지를 댄 역마차가 그것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그리운 것은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이 금지되기 이전의 세상이다. 열여섯 살에 처음 피운 담배부터(워싱턴에서 있었던 케네디의 장례식에서 친구들과 함께) 이전 밀레니엄이 끝날 때까지, 당신은 몇 가지 예외 사항이 있을 뿐 원하는 곳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우선 레스토랑과 바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지만 대학교 강의실과 영화관 발코니, 서점과 음반 가게, 병원의 대기실, 택시, 야구장과 실내 경기장, 엘리베이터, 호텔 방, 기차, 장거리 버스, 공항, 비행기, 비행기까지 데려다 주는 공황의 순환 버스에서도 자유롭게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엄격한 금연법 덕분에 이제 세상은 더 살 만한 곳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잃어버린 것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편안함?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관용? 유쾌함? 청교도적 고뇌의 부재?) 당신은 그것이 그립다.
- 197~198쪽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여전히 악동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는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며 추억에 젖는다. 그리고 그 회상에 독자를 동참시키고 그 대가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농밀한 성 경험과 모험담, 궁핍하고 부끄러웠던 치기어린 젊은 시절, 비밀스럽고 어두운 가족사, 첫 경험과 성병의 기억들, 비겁한 행동과 공격적인 성향들, 심지어 자신이 지금껏 살았던 집의 주소들부터 그곳의 공간, 거주민을 비롯한 세세한 기록들까지 남긴다.

즉, 이 작품은 작가의 삶의 기록이자 경험담, 혹은 내적 고백이다. 작가가 자신에게 하는 고해성사다. 그것이 마치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서사와 상관없이 무의식적인 고백처럼 서술된다. 쉼표의 사용이 많고, 직접 대화체가 없는 만연체다. 심지어 한 문장이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긴 문장도 있다. 그럼에도 문맥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읽는 재미가 있다. 그것이 폴 오스터의 문장이니깐.

​다만 아쉬운 것은 번역이다. 맞춤법이 틀린 단어들도 몇 개 있고, 약간의 비문도 종종 발견된다. 폴 오스터 특유의 문체가 지난 번역본부터 사라진 느낌이다. 물론 사심이 많이 반영된 감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 오스터의 다음 작품은 언제나 훌륭하다. 그냥 폴 오스터이니깐. 그것으로 된 거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 옮겨 본다.

당신은 삼촌에게 맞서 고함칠 용기가 있었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다면 적어도 톰의 뒤를 쫓아 달려가 그에게 가지 말고 있어도 좋다는 말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왜 그러지 못했던가? 그때 당신이 어째서 제대로 된 태도를 취하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숨을 거둔 충격도 변명이 될 수 없다. 행동을 했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당신은 차별대우를 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들고 일어섰다. 당신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는 원칙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만큼은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행동하지 못했던 탓에 스스로를 더 이상 영웅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던 것 같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에. - 185~186쪽​

덧붙이는 글 | <겨울일기>(폴 오스터 씀 / 송은주 역 / 열린책들 펴냄 / 2014.01.15 / 1만1800원)
본인 블로그에도 중복게재합니다. blog.naver.com/mmpictures



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열린책들(2014)


#겨울일기#폴 오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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