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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양극장
 순양극장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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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 동 . 석 . 유… 어디서 봤더라! 맞다, 바로 거기였어. 순천 드라마 촬영장.'

드라마 <감격시대 : 투신의 탄생>에 푹 빠져 있는 중이었다. 눈에 익은 간판을 보니 까닭 없이 반가웠다. '대동석유'는 <감격시대>의 주인공 신정태(김현중 분)가 몸담고 있는'도비패' 본거지 입구에 걸려있는 간판명이다. 

지난해 말, 순천 드라마 촬영장에 다녀왔다. 한 해를 보낼 때 마다 찾아오는 스산함을 달래기 위해 전남 해남과 순천을 여행하던 중 잠시 들렀었다.

순천 드라마 촬영장은 1960년대~1980년대 무렵 우리나라 소도시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어, 근현대극 촬영지로 자주 이용되는 곳이다. <늑대소년>, <님은 먼 곳에> 등의 영화와 <빛과 그림자>, <제빵왕 김탁구> 등의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하다. 

분명 과거로의 여행이었지만, 내게는 예스러운 느낌 보다는 오히려 모던한 느낌이 더 강했다. 조선시대 읍성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낙안읍성을 전날 들렀던 터고, 태어나 자란 마을이 드라마 촬영장보다 훨씬 더 예스러운 농촌이기 때문이다.

꽤 쌀쌀한 날씨의 평일인데도 순천 드라마 촬영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특히, 인기가 많았던 드라마 촬영 장소에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드라마 <빛과 그림자> 촬영장소로 유명한 '순양극장' 앞은 기념촬영을 위해 줄을 서야 할 판이었다.

웃고 떠들며 갖가지 재미있는 포즈로 기념촬영 하는 모습을 보니 내 기분도 괜스레 들떴다. 이들 틈에 끼어 나도 웃고 떠들며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어 볼까 하다가 내키지 않아 그만 두었다.

그 대신 난 순양극장 앞에서 잠시 옛 기억을 더듬었다. 순양극장과 거의 같은 모습의 극장이 고향 읍내에도 있었다. 그곳이 내 인생 첫 극장이다. 주말의 명화를 즐겨보던 촌뜨기가 읍내로 유학 가서 생애 처음으로 극장이란 곳을 경험한 것이다.

 순천드라마촬영장
 순천드라마촬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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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충격과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텔레비전보다 스무 배는 커 보이는 대형화면과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웅장한 음향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영화 또한 충격적이었다. 인육을 먹는 병에 걸린 사람들의 비극을 그린 <지옥의 카니발>이라는 공포 영화였다. 주말의 영화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충격적인 내용과 영상이라, 영화가 끝날 때 까지 단 한순간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고,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그 영화를 본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선생님 눈을 용케 피하고 본 영화라 더 재미가 있었다. 그 이후로, 난 그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 하지만 그 극장에 발을 들인 것은 졸업 할 때 까지 겨우 두세 차례뿐이었다. 선생님 눈을 피하기가 만만치 않았고, 주머니가 너무나 가벼웠기 때문이다.

추억은 검정 고무신을 타고 온다

순양극장을 지나 우측으로 돌자 신발가게가 보였다. 그 신발가게 앞에서 난 하마터면 "와아 검정 고무신이다"하고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반가웠다. 천둥벌거숭이 같았던 어린 시절이 검정 고무신을 타고 확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검정고무신에는 내 어린 시절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검정 운동화를 신기 전 까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 발엔 늘 검정고무신이 신겨져 있었다.  

"와아! 저건 서울 간 오빠가 설날 사오던 빨간 구두네"

내 또래 정도 돼 보이는 여성이 반가운 듯 이렇게 소리쳤다. 정말로 빨간 구두였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에 서울 간 '오빠'가 아닌 서울 간 '누나'가 설날 내게 선물 한 빨간 구두였다.
 검정고무신
 검정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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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내게 빨간 구두를 주며 신어보라고 했다. "서울에 사는 남자 애들은 이런 거 신고 다닌다"는 거짓말과 함께. 결국 난 그 구두를 신고 말았다. '서울 애들 어쩌구'하는 말에 혹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누나가 서운해 할까봐 마지못해 신었던 것 같다.

그 구두는 누나가 설을 지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만 신었다. 버스정류장에 가서 누나를 배웅해 주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벗어 던져 버렸다. 또래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얼레리꼴레리'란 말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어째서 여자도 아닌 남자인 나한테 빨간 구두를 선물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작심하고 물은 적도 없고, 우연히 들은 적도 없다.

다만 상상을 해보면, 그 구두는 누나의 어린 시절 로망 이었던 것 같다. 누나의 어린 시절도 분명 '검정 고무신인생' 이었을 터. 작고 앙증맞은 빨간 구두를 신고 싶었지만 신을 수 없었던 설움을 남동생인 나를 통해서라도 억지로 풀어보려 하지 않았을까 싶다.

누나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난 검정고무신이 정말로 좋았다. '마징가 제트'가 새겨진 운동화를 사다줘도 검정고무신을 신겠노라 떼를 쓸 만큼 좋았다.

검정고무신은 운동화에 비해 자유로웠다. 뜨거운 여름날 신발을 벗지 않고도 냇물에 뛰어들 수 있는 자유를 주었고, 비온 날 신발 더러워질 걱정 없이 물탕을 튀기며 마음껏 신작로를 달릴 수 있는 자유도 주었다. 

용도도 참 다양했다. 뒤꿈치를 꺾으면 화물차 모양의 장난감이 됐고, 물가에 가면 나룻배 모양의 장난감이 됐다.   

난 그 검정고무신 자동차를 가지고 놀며 운전사가 되는 꿈을 꿨다. 운전사가 되면 넓은 세상을 맘껏 구경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산 너머 세상,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 너머 세상을 운전사가 되어 맘껏 구경하고 싶었다.

 순천 드라마 촬영장, 달동네
 순천 드라마 촬영장, 달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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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드라마 촬영장엔 이밖에도 추억을 떠올리게 해 주는 많은 것들이 있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플래카드, 제빵 왕 김탁구 촬영지로 유명한 빵집, 양복점 ,달동네 등. 이 많은 것들이 하나 같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모습으로 사람들을 반긴다.

지난해 말, 내가 그곳을 방문 했을 때만해도 <감격시대>가 방영되기 전이라, 대동석유란 간판은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다. 별로 눈에 안 띄는 한적한 곳에 있는 그저 그런 낡은 건물이었다. 아마 지금쯤은 대동석유란 간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그 곳이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대동석유란 간판을 보고 왜 그렇게 반가웠느냐 하는 것이다.  그곳을 미리 가봤을 뿐이고, 드라마 촬영장이니 드라마를 찍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일까, 어째서 그리도 반가웠던 것일까?

그 이유는, 생각에 생각을 곱씹어 본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추억이다. 대동석유가 추억을 불러 내 주었기 때문이리라. 순양극장과 고무신에 깃든 내 지나간 기억을. 추억은 그런 것이다. 갑자기 찾아와 나를 반갑게 맞아 주는 것, 그게 바로 추억이다. 생활에 치여 가슴 한편이 텅 빌 때마다 난 추억을 꺼내 먹으며 빈 가슴을 채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타임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순천 드라마 촬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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