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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서점의 서가.
오래된 서점의 서가. ⓒ sxc
2014년 새해 첫 날, 한 서점인이 조용히 세상을 버렸다. 그는 22년째 서점을 운영해왔고, 서점을 하면서 남매를 낳고 노부모를 모셨다. 그런 서점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생존이 불가능했던 게다.

왜 불가능했을까? 우선 1990년대 후반 유통구조의 틈새를 파고든 도서할인매장이 많은 이들을 벼랑으로 내몰았고 미국의 인터넷 서점 아마존을 그대로 모방한 우리 인터넷 서점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의 성공은 유통의 합리화를 가장한, 불공정한 유통의 가격경쟁력 우위에 기인한 바 크다.

인터넷 서점과 대형출판사들은 소비자를 위한다며 지금도 '반값 할인'을 줄기차게 해대고 있다. 역설적으로 뒤에서는 적정 할인율을 위한 담합행위 시도 소식이 들린다. 실제로 지난해 1월 공정거래위원회는 인터넷 서점 등에서 판매되는 참고서 할인율을 15% 이내로 제한하기로 담합한 4개 출판사에 대해 시정명령과 9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적이 있다.

반값 할인으로 인한 출판산업의 불황 원인은 메이저 인터넷 서점과 그에 부응하는 출판사에 있다. 책을 노출시키고 매출을 메꾸려는 출판사들의 시도와 매출을 점유하려는 인터넷 서점의 욕망이, 보호받아야 할 문화사업을 공산품 취급하는 곳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덤핑 경쟁 탓에 출판사들은 수지를 맞추기 어려워졌다. 일정 시점이 지나자 책값에 거품이 끼기 시작했고, 이것을 알 리 없는 독자들은 높은 할인율과 사은품을 안겨주는 인터넷 서점의 매출만을 올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유통구조상 할인을 제한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동네 서점들은 점점 몰락했다.서가가 듬성듬성 해지더니 급기야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잦아졌다. 현재 오프라인 동네 서점은 거의 전무해 보이기도 한다. 10년 전인가 5000개가 넘던 서점이 수년 사이에 1700개가 되었다고 한다. 학생 참고서만 놓고 파는 서점을 제외한다면 1000개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하긴 처음 반값 할인을 시작한 인터넷 서점에서 '엽기세일'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젠 그런 행위가 일상화 되다보니 이런 엽기적인 유통을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되긴 한다. 현재의 서점은 엽기적이다. 소비자들이 인터넷 서점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수많은 책을 받고 그 책을 팔아 서점을 유지하니 엽기가 아니고 무엇일까?

'가격 신뢰' 사라진 소비자... 덤핑 경쟁 막을 방법 있나

최근 서점업계에 치명적일 수 있는 엽기적인 일이 또 벌어졌다. 인터넷 서점과 일부 메이저 출판사가 도서정가제 할인율 변경을 요구했다는 소리가 들리는 사이, 이마트가 기탄교육과 손을 잡고 그동안 관행으로 버텨나가던 참고서 시장에서 가격파괴 행사를 기획했다(관련기사 : "이마트의 반값 참고서... 우린 '도둑놈' 됐다"). 책잔치 행사 같은 데서 몰래 하던 덤핑이 대형유통업체의 새로운 판매 아이템으로 떠오른 것이다.

'반값 참고서'라 이름 붙이고, 2만3500원 가격의 도서 3종 세트를 57.8% 할인해서 9900원에 판매한다는 것이다. 이 가격은 출판사가 서점에 책을 공급하는 가격인 1만5275원(정가의 65%)보다 훨씬 낮은 가격이다. 유통과정을 줄였다는 뻔뻔한 소리도 들린다. 말 참 좋다. 필자가 운영하는 서점은 기탄교육과 직거래를 함에도 정가의 65% 가격으로 입고된다. 이 가격은 서점에서 20% 할인판매 할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니, 실은 정가의 85% 가격에 출고한 것이고 서점의 마진은 15% 내외라고 보면 된다.

이마트에 납품되는 책의 공급가는 권당 1500원 이하로 추정되는데, 이 정도면 종이에 잉크만 바른 수준이고 일반서점 공급가격의 1/3에 해당한다. 당신이 소비자라면 어디서 책을 사겠는가? 그러나 이마트와 출판사는 일반서점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칠 것이 예상되는데도 예고 없이 행사를 진행했다.

 이마트 내 서적코너가 연초부터 초등학교 신학기 참고서를 구매하기 위해 몰려든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2만3500원을 줘야 살 수 있었던 기탄교육의 수학참고서 3권이 세트로 9900원에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마트 내 서적코너가 연초부터 초등학교 신학기 참고서를 구매하기 위해 몰려든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2만3500원을 줘야 살 수 있었던 기탄교육의 수학참고서 3권이 세트로 9900원에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마트

기탄교육 측 관계자는 "1회성 행사이니 양해 바란다"고 했지만, 이는 양해할 성질의 마케팅이 아니다. 단행본도 아니고 전집도 아닌, 그나마 서점의 명맥을 유지시켜주는 참고서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그런 덤핑 행사를 할 수 있을 만한 메이저 참고서가 몇 종류인지 진정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싶다.

이번 기획으로 기탄교육이 재미를 봤다는 소문이라도 돌기 시작하면 대다수의 출판사들이 대형할인점과 참고서 행사를 기획하고 덤핑용 참고서를 제작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콘텐츠는 있으니 종이에 잉크만 바르면 되는 손쉬운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다른 대형유통업체나 인터넷 서점들은 가만히 있겠는가? 출판사에게 그런 상품을 기획판매 하자고 제안할 것이 분명하다. 싼 맛에 참고서를 산 학부모들은 동네 서점에서 제 값을 주고 책을 사는 데 더욱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동네 서점'이란 말은 사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시대

이마트 담당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앞으로 인기서적도 할인판매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독서인구의 감소와 인터넷 서점의 반값 할인으로 손님을 빼앗기고, 이젠 참고서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살 길 찾기에 여념이 없는 서점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다. 매출을 위한 비즈니스 마인드가 양심과 염치를 상실케 만들었다. 그 양심과 염치의 상실을 또 위기라는 말로 정당화 시킨다.

소비자는 가격에 대한 신뢰를 잃은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다. 홈쇼핑의 도를 넘어선 책 할인판매, 인터넷 서점의 반값 판매, 책잔치 행사의 덤핑판매가 전과 같이 독자의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은 책값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 않은가. 서점의 책 가격이 제 가격이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해졌음을 느낀다.

이참에 "대한민국 서점인들은 이마트를 이용하지 않습니다"라거나 "우리 서점은 기탄교육 책을 취급하지 않습니다, 덤핑 판매처를 이용하세요"라고 서점 앞에 포스터를 붙이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서점인들은 자신의 가게에서 '덤핑 출판사'의 책을 뺄 용기가 없을 것이다. 불공정한 관행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을'의 지위로 처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서점과 출판을 망치는 하나의 요인이다.

4000종 이상을 상시적으로 50% 할인하는 여러 인터넷 서점이 있으니 '반값 참고서' 정도는 호들갑 떨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대형유통업체의 광고효과를 감안하면 앞으로 벌어질 일은 동네 서점에게 녹록치 않다. 가격 신뢰의 상실이 가져올 소비자와의 불화를 어찌 해소해낼 것인지 답답하다. 그렇지 않아도 책값이 올랐다고 서점에 항의하는 소비자들인데 말이다.

불경기에 단돈 100원이라도 아끼려는 소비자의 주머니만을 고려하면 이런 가격파괴 행위가 소비자에게 잠시 기쁨을 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다. 대형유통업체와 인터넷 서점, 그리고 매출에 목을 매는 출판사는 조삼모사 식으로 그들의 이익을 언젠가는 독자에게 받아낼 것이다. 동네 서점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만 볼 수 있을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서울에서 중소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반값참고서#도서정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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