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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노래 속의 '오빠'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리고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어린 누이동생에 '비단구두'를 사가지고 온다고 약속했으면서 그는 왜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지는 찬바람이 불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왜 이런 동요를 일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탄압하였던 것일까.

1918년 12월 현재 우리 민족과 일본인이 우리나라 땅 안에서 소유한 토지의 넓이를 비교해보면 일제의 검은 욕심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200정보(1정보는 약 3천평) 이상의 땅을 소유한 사람은 조선인이 60명, 일본인이 144명이었다. 본래 우리 땅인데도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에 비해 넓은 땅을 2.5배 정도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150정보 이상도 조선인 74명, 일본인 96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100정보 이상 역시 조선인 94명, 일본인 115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역시 일본인들이 우리 국토의 실질적 주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남의 땅에 세를 내고 농사를 짓는 소작의 비율은 점점 높아졌다. 소작을 짓는 땅의 비율이 1920년에는 전체 농토의 50.8%였는데 1930년에는 55.6%로 크게 늘어났다. 소작 농사를 짓는 농민의 수 역시 마찬가지여서 1920년에는 108만2842명이었는데(전체 농민의 39.8%) 1930년에는 133만3139명(전체 농민의 46.5%)으로 엄청나게 늘었다. 결국 우리 민족은 본디 국토의 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 어렵고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궁지로 내몰린 것이었다. 일본은 우리 민족의 자립을 억누르기 위해 땅부터 빼앗았던 것이다.

 박태준은 대구의 계성학교를 졸업했고, 모교에서 교사 생활도 했다. 사진은 그의 재학 당시 건물인 계성학교 옛건물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야경이다.
박태준은 대구의 계성학교를 졸업했고, 모교에서 교사 생활도 했다. 사진은 그의 재학 당시 건물인 계성학교 옛건물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야경이다. ⓒ 정만진

이 점은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예로 경성제국대학 예과(현대의 서울대학교) 학생수를 살펴보자. 1924년에는 조선인 44명에 일본인 124명(총 168명 중 조선인 26%, 일본인 74%), 1925년에는 조선인 91명에 일본인 228명(전체 319명 중 조선인 29%, 일본인 71%), 1926년에는 조선인 103명에 일본인 235명(전체 338명 중 조선인 30%, 일본인 70%), 1927년에는 조선인 104명에 일본인 204명(전체 308명 중 조선인 34%, 일본인 66%)으로 우리 땅에 세워진 대학임에도 일본인 학생이 2배 이상 재학하였다. 

게다가 그렇게 숫자상의 차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관공립 전문학교, 경성제국대학 등 고등교육 기관의 입학 여부는 실력 본위, 성적 본위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우선 입학시키고 다음으로는 사상 성분(친일 성향)에 따라 인물 본위로 입학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을 입학시켜주는 경우에도 친일파 위주로 넣어줌으로써 결국 일제는 식민지 정책에 아부하는 자들을 배출하는 통로로 대학을 이용하였으니, 이 또한 일제의 우리나라 지배를 영원히 유지하려는 음모였다.

나아가 일제는 지독한 탄압을 저질러 (기독교나 천주교, 불교 등의 종교 기관에서 세운 탓에 외국과의 관계 등도 있었으므로 국립이나 공립학교에 비해 탄압하기가 조금 더 어려운) 사립학교의 수도 해마다 급격하게 줄어들도록 만들었다. 종교계 학교가 1910년 823개였던 것이 1919년에는 260개로 격감하였고, 1940년에는 불과 120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는 비종교계 학교도 마찬가지여서, 1910년 1418개였던 것이 1919년에는 463개, 1940년에는 271개로  그 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 결과 사립학교는 획일적인 기준에 맞출 것을 요구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사의 인사에서부터 교과 학습 분야에까지 타율적인 규제를 받기까지 이르렀다. 즉, 사립학교 교원이 일본어에 통달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일본어의 보급을 꾀하고, 당시 각급 학교별 전체 교원수에 대한 일본인 교원의 비율은 상업학교 교원 7명 중 6명이 일본인으로 86%, 보통학교는 26%가 일본인 교원이었다. 일제는 교육을 자기들 마음대로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미래를 어둡게 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박태준은 동산병원을 사이에 두고 계성학교와 마주보고 서 있는 신명학교의 어떤 여학생을 짝사랑했다고 전해진다. 신명학교가 서 있는 언덕은 선교사주택 등에 담쟁이가 많아서 청라언덕이라 불려졌다. 박태준이 그 사연을 말하자 이은상이 노랫말에 청라언덕을 넣었다.
박태준은 동산병원을 사이에 두고 계성학교와 마주보고 서 있는 신명학교의 어떤 여학생을 짝사랑했다고 전해진다. 신명학교가 서 있는 언덕은 선교사주택 등에 담쟁이가 많아서 청라언덕이라 불려졌다. 박태준이 그 사연을 말하자 이은상이 노랫말에 청라언덕을 넣었다. ⓒ 정만진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제 때문에 살기 어려워진 민족의 현실을 이야기하거나, 장차의 밝은 앞날을 위해 힘차게 나아가자는 식의 내용을 담은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일본이 그냥 두고만 볼 리는 없었다. 일제가 <오빠 생각>을 불러서는 안 되는 노래로 정하여 금지시킨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였던 것이다. 오빠가 간 곳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오빠가 왜 돌아오지 않는지 곰곰 따져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오빠가 간 곳이 꼭 '서울'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빠가 '사 오마'고 약속한 선물이 반드시 '비단구두'인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빠는 어디로 갔을까. 그 곳은 독립 운동을 하는 만주 벌판일 수도 있고, 중국일 수도 있으며, 미국일 수도 있고, 어쩌면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이 땅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수도 있다. 오빠가 가지고 돌아오겠다고 한 것은 '나라의 독립'일 수도 있고, 우리나라 사람도 교육 받을 수 있고 잘 살 수 있는 권리일 수도 있다.

<오빠 생각>을 노래로 부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이미 그 점을 눈치 채고 있었고, 그래서 <오빠 생각>을 그토록 열심히 불렀던 것이다. 그 누구도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심으로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서울에 비단구두를 사러 간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오빠가 사실은 우리 민족의 부활,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을 일구어낼 힘찬 젊은이라는 사실을 모두들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질 때
엄마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가을밤 고요한 밤 잠 안 오는 밤
기러기 울음소리 높고 낮을 때
엄마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가을밤>도 노래해보면 이런 우리 민족의 슬픔은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나라를 빼앗기고 사람의 권리를 강탈당하였으니 지금은 낮이라도 '밤'이다. 어둠이 밀려오면 아이들은 낮보다도 더욱 '엄마품'이 그리운 법이니, 식민지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은 (친일파를 제외하면) 누구나 다 엄마품(독립된 우리나라)이 그리울 것이다.

자주 독립된 조국이 그리워 눈물이 샘솟을 터이다. 당연히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릴 것이며, 그 희망이 바로 '별'이다. '별'은 희망이고 꿈인 까닭이다. 다른 것은 쳐다보지도 않고 별'만' 센다고 하니, 그 얼마나 강렬한 꿈이자 희망인가. 불러보면 자연스레 슬픈 기분이 살아나지만, 그러나 이 노래는 모두의 '별'을 노래하고 있으니, 일제로서는 이러한 동요들이 그토록 미웠을 터이다.

 청라언덕에 세워져 있는 박태준 노래비
청라언덕에 세워져 있는 박태준 노래비 ⓒ 정만진

여기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나아간 노래가 바로 <동무 생각>이다. 밝고 아늑한 정감이 흐르는 이 곡은 신식 노래라고는 일본의 이른바 학교 창가나 유행가류밖에 모르던 당시의 청소년에게는 신선한 것이서 <오빠 생각>이나 <가을밤>에 비해 더욱 꿈과 희망이 솟아오르는 느낌이 든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희망찬 시간을 맞이하여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는데 어찌 밝고 희망차지 않으랴.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박태준의 노래는 해방 이후에는 신나고 밝고 경쾌하기 짝이 없다. <새나라의 어린이>가 그 대표작이다. 해방되자마자 제헌절 노래(가사: 정인보)를 작곡한 박태준이니 이제 그의 노래가 밝고 경쾌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서로서로 돕습니다
욕심장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거짓말을 안 합니다
서로 믿고 사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쌈을 하지 않습니다
정답게들 사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몸이 튼튼합니다
무럭무럭 크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어린 시절에 불렀던 동요는 평생을 두고 정서의 샘으로서 기능을 하고, 노래의 고향으로 작용한다. 특히 일제 식민지 시대의 우리 창작 동요는 단순히 '어린이의 노래'에 그치지 않고, 어려운 시대에 민족과 애환을 같이한 민족의 노래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의 동요는 일제 치하라는 암울한 시기에 민간인이 주도한 자생적 민족문화 운동의 일환으로 발생되었고, 그리고 전개되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일본 창가만 가르쳤고, 학교 밖에서도 일본 노래가 범람하여 조선의 어린이들이 부를 만한 마땅한 노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던 1920년대 일제 강점기 시기에, 뜻있는 몇몇 인사들은 조선 어린이의 심성에 맞는 새로운 노래를 창작 보급함으로써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교양을 심어주고 정서를 함양시켜 주는 동시에 노래를 통해 애국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족혼을 심어 주자는 생각에서 음악 활동을 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박태준의 <오빠 생각>도 물론이려니와 우리나라의 창작 동요는 윤극영의 <반달>, 홍난파의 <고향의 봄>과 <봉숭아>, 현제명의 <고향 생각> 등이 하나같이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다.

박태준이 졸업을 했고,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던 대구의 계성학교, 그리고 <동무 생각>의 지리적 배경이었던 청라언덕이 대구에 남아 있다. 계성학교에서 동산병원을 거쳐 선교사주택 밀집지로 이어지는 청라언덕은 1919년 대구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로의 일부이기도 하다. 언덕 중간쯤에 가면 박태준 노래비도 볼 수 있다.


#박태준#동무생각#청라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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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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