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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수학능력시험이 채 치르지도 않았는데 대학의 수시모집 합격자 발표가 먼저 났다. 딸은 그날 아침부터 발을 동동거리며 거실의 PC 앞을 떠나지 못했다. '저렇게 목이 빠져라 합격을 고대하고 있는데 그러나 혹시 불합격이라도 한다면...?!'

필시 딸은 의기소침하여 깊은 못(池)에 잠긴 것처럼 침잠할 것이다. 이런 불길한 예감은 나까지 덩달아 심란하게 했다. 딸은 다른 건 몰라도 어려서부터 공부 하나 만큼은 정말이지 그야말로 '똑소리 나게' 잘했다.

초등학교부터 고교 3학년 때까지 부동의 전교 1등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딸은 수시 모집하는 대학 몇 군데에 원서를 냈던 것이다. 아무튼 저벅저벅 시간은 흘러, 오후 4시쯤 되었을까. 제 방에서 나온 딸이 다시금 거실의 PC 앞에 앉았다.

나는 의도적으로 못본 척 하려고 안방으로 들어가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드라마는 당최 흥미롭지도, 또한 눈과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딸의 환호성이 터졌다.

"와~ 합격이다! 아빠, 엄마. 저 합격했어요!!"

그 소리에 안방 문을 박차고 나와 거실로 뛰쳐나갔다. 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향해 보니, '서울대학교 합격자 발표' 창에 내 딸의 이름 석 자가 온전히 올라와 있었다. 순간 눈앞이 흐려지면서 눈물이 마구 솟았다. '아~ 내 딸이 그예 서울대에 합격했구나! 고맙다, 정말 고마워!'

나는 너무 기뻐서 딸을 냉큼 껴안고 거실 바닥을 뱅뱅 돌았다. 아내도 어느새 솟구치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평생을 비정규직으로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아빠의 딸이 마침내 영광의 서울대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딸은 그날 모 의대에서도 합격증을 '받았다(합격증을 프린터로 출력)'. 딸이 서울대에 합격했다고 하자, 딸의 고교에서도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학교는 2년 동안 서울대를 단 한 명도 보내지 못한 때문이었다.

한데 딸은 2배수 합격자로 발표되었기에 서울대에서 '조건'이 붙어 있었다. 즉 수능을 봐서 일정 점수 이하일 경우엔 불합격 처리 한다는 '약속'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딸은 그날부터 당장 더욱 치열한 공부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마침내 수능일은 다가왔다.

수능 당일 아침에 딸을 둔산여고 앞까지 따라가 배웅했다.

"우리 딸, 힘내! 넌 잘할 수 있어!"

본래 좋고 훌륭한 것은 비록 상해도 그 본질에는 변함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물어도 준치 썩어도 생치'라 했던가. 딸은 우려와는 달리 수능도 너무 잘 보았다. 그 덕분에 딸은 마침내 서울대의 '완전한' 합격증을 수령할 수 있었다. 당초 딸은 서울대보다는 중복으로 합격된 모 의대를 희망했다. 그러자 학교(고교) 측의 강력한 '태클'이 들어왔다. 학교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서울대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저 녀석이 제 딸이긴 하지만, 어려서부터 제 맘대로 뭘 해라 말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대학의 선택 역시도 딸의 몫입니다."

학교에선 더욱 노골적으로 서울대행을 요구했다. 그래도 딸이 요지부동이자, 이번엔 나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000 아버님, 따님을 반드시 서울대로 보내주십시오! 그래야 교장선생님 위신도 살고 저도 나중에 승진하는데 지장이 없거든요."
"......!"

그랬음에도 딸은 시무룩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인 나는 조바심에 딸에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나 때문에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서울대로 간 것에 대해 나중에라도 날 원망하는 거 아니지?"

딸은 깔깔 웃었다.

"의사 안 된 거 후회 안 해요. 대신에 제가 평소 하고자 했던 공부에 더욱 열심히 매진하면 되니까요."

이듬해 서울로 올라간 딸은 서울대에 이어 동 대학원을 올 2월에 졸업했다. 그리고 지금은 모 대형병원에서 일종의 인턴과정인 수련생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 추석에 뵌 처 외숙모님의 아들은 의사다. 이따금 뵙는 처 외숙모님께선 늘 그렇게 내 딸의 안부를 물으신다.

"딸이 병원에 있다면서?"
"네."
"지난 얘기지만 서울대 대신 의대를 보냈어야 했어. 그랬다면 어려운 자네의 집안 형편도 쫙 펴질 수 있었으련만..."

나는 일부러 여유있게 웃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딸은 지금도 자신이 의사가 안 된 것에 대해 아무런 유감도 표명을 안 하니 됐습니다."  

덧붙이는 글 | '입시가 뭐길래' 공모 응모글입니다.



태그:#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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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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