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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금 뭐해?"

수화기를 들어 "여보세요"라고 하자마자 동네 어르신의 목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그냥 텔레비전 보고 있어요."
"그럼 뭐든 먹을 거 있으면 좀 가지고 우리 집에 와. 건너 동에 친구도 온다고 했으니까. 난 지금 막걸리 사러 나왔다고."
"예, 형님."

아들 며느리 눈치 안보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혼자 사는 어르신은 마음이 편치 않을 때면 성당 친구들을 불러서 수다도 떨고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가까운 거리에 사는 아들 며느리가 효자이긴 하지만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남편을 대신하지는 못하나 봅니다. 막걸리를 사러 나왔다고 하신 것으로 보아 또 막걸리 힘을 빌려 가슴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노래라도 부르실 모양입니다. 오늘은 그럴 만도 합니다. 어르신은 며칠 후에 백내장 수술을 합니다. 

어르신은 백내장 수술 받을 일을 생각하면 무섭고 겁이 난다고 합니다. 아들이나 며느리가 보호자로 동행을 해주면 의지가 되어 한결 두려움이 덜 할 것 같은데 맞벌이를 하고 있어서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는데, 아니 꺼낸 것만 못한 상황이 됐다고 합니다.

"요즘 백내장 수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두 눈을 한 번에 하는 것도 아니고 한 쪽 수술하고 2~3일 후에 또 한쪽을 하잖아요…."

순간 어르신은 더 듣지를 않고 휴대전화를 탁 접었다고 합니다. 그 성질에 '혼자 가셔도 되요' 하고 나올 게 뻔하다는 것입니다.

"살림하면서 직장에 매어 사는 사정이라 해도 그렇지…. 어찌 그리 매정하게 말을 하는지…. '쟤 내 며느리 맞아?'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서러워지더라고."

그때 내가 보호자가 돼주겠다고 자처하자 건너 동에 사는 어르신도 동행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아들 며느리 만큼은 못합니다.

어쩐지 오늘은 어르신이 수다 떨기는 안하고 노래만을 부르실 듯합니다. 어르신의 노래는 수준급입니다. 언제나 18번인 <두만강 푸른 물에>로 시작을 해서 <목포의 눈물> <고향역> <립스틱 짙게 바르고> <백만송이 장미>로 흘러가곤 하지요.

어르신의 오랜 친구인 건너 동에 어르신 역시 노래를 잘 부릅니다. 어르신들은 손뼉으로 가만 가만 박자를 놓으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두 어르신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보면 가슴이 뭉클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애절한 멜로디와 노랫말이 어르신들의 살아온 세월을 함축한 이야기 같고 또 내 이야기 같은 순간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동그랑땡 반죽입니다 막걸리 안주로는 훌륭합니다 어르신이 좋아하실 거예요
동그랑땡 반죽입니다 막걸리 안주로는 훌륭합니다어르신이 좋아하실 거예요 ⓒ 김관숙

막걸리 안주로 뭘 가져가야 하나 중얼거리면서 냉장고를 열어 봅니다. 문득 지난 추석 때 먹고 남은 동그랑땡 반죽이 생각납니다. 간이 잘 배인 동그랑땡 반죽을 랩에 놓아 김밥을 말듯이 도르르 말아 냉동실에 두면 꽁꽁 얼어서 원형 막대기처럼 됩니다. 아직 다섯줄이나 남았습니다. 그 막대기 같은 동그랑땡 반죽 두 줄과 계란 다섯 개, 밀가루 한 공기, 사과 세 개를 챙겨서 비닐봉지에 꾸려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동그랑땡 반죽은 어르신 댁에 가는 동안에 적당히 녹아서 전을 부치기에 알맞은 상태가 될 듯합니다. 어르신 댁에 가자마자 동글동글하게 썰어서 밀가루에 굴려 계란 물을 입혀서 노릇노릇하게 부치기만 하면 됩니다. 막걸리 안주 감으로는 훌륭합니다.

화단 길을 돌아서 어르신이 사는 동 앞으로 막 들어섰을 때입니다. 주차장에서 어르신의 아들이 걸어 나오다가 나를 보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합니다. 

"또 어머니가 호출하셨나 보네요, 어머니 잘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이네."

그때 어르신과 건너 동에 어르신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상가 쪽에서 오다가 우리 모습을 보자 잰걸음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들이 어르신 손에 들린 불룩한 검은 비닐봉지를 빼앗다시피 해서 열어보더니 인상까지 쓰면서 싫은 소리를 합니다. 

"백내장 수술 하셔야 하는데 막걸리 드시면 어떡해요!"
"니가 수술 날짜를 알고나 있어?" 

어르신이 목소리를 높이자 아들이 얼른 눈치를 챘습니다.

"저랑 집사람이 월차를 내기로 했어요. 왼쪽 눈 수술할 때는 제가, 오른쪽 눈 수술할 때는 집 사람이 어머니를 모시고 갈 거예요. 지금 담당 의사선생님을 만나보고 오는 길이고요. 그러니까 화 푸시고 그만 들어가세요. 저 빨리 회사에 들어 가봐야 해요. 전화로 말할까 하다가 어머니 얼굴 보려고 일부러 들린 거예요."
"너 아니라도 나 걱정해 주는 사람 많다!"

아들은 어머니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내게 눈인사를 하더니 막걸리 비닐봉지를 덜렁거리며 주차장 쪽으로 갑니다. 어르신이 소리쳤습니다.

"요즘 백내장 수술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 혼자 가도 되니까 오지 말어! 오지 말라고!"

어르신에 뼈 있는 말을 아들이 알아들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돌아봅니다. 대입 수험생인 딸아이 뒷바라지를 하면서 직장생활 하느라 늘 피곤하고 바쁜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처신이 힘들 것입니다. 아들은 무언가를 참는 눈빛이다가 이내 웃음을 물고 어머니를 향해 손을 높이 들어 한 번 흔들고는 승용차의 문을 열었습니다. 효자입니다. 둘도 없는 효자입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저 눔이 필시 며느리를 설득했겠지. 우리 집은 늘 그렇게 산다고!"

어르신은 혼잣말을 하면서 상가 쪽으로 다시 몸을 돌립니다. 막걸리를 사러 가는 어르신의 팔을 건너 동 어르신이 잡아당겼습니다. 어르신은 매섭게 뿌리치고 걸음을 빨리 합니다. 

어르신은 언제나 막걸리를 두 병 삽니다. 오늘은 백내장 수술 날짜를 잡아놓은 어르신을 위해서, 효심 깊은 어르신의 아들을 생각해서 어르신 보다 내가 더 막걸리를 많이, 아주 많이 마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막걸리에 빨갛게 취할 일이 생겼습니다.


#백내장 수술#막걸리#아들의 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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