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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고추 잘 됐어?"

계산댁이 비식비식 웃으며 물었다. 고추 두 고랑 심어놓고 돌보지 않아 풀에 잠긴 내 밭 꼬라지를 봤을 터다. 옆에 계신 노인회장님도 고추가 어떠냐고 물어보신다.

"아이 올해는 망쳤어요. 그나마 고추 말린 것도 비가 들쳐 썩히고. 인자 내년에는 한 번 잘 해볼라고요."

내 말에 여든 중반인 탑골할매가 한마디 하셨다.

"젊은 사람은 저리 말하는데 우리는 그런 말 못해."

연세가 많으시니 내년이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사실 누구나 오늘이 있을 뿐이기는 하다. 그러면서도 내일을 말하고 내년을 말한다.

 좀 더 잘 해 볼 걸...  미안하다  고추나무(?)들.
좀 더 잘 해 볼 걸... 미안하다 고추나무(?)들. ⓒ 김영희

비가 내리고 난 후, 나는 얼른 고추밭으로 갔다. 한동안 못 가보던 밭이라 궁금하기도 하고, 형편 봐서 고추 뽑고 배추를 심을 작정이었다.

풀 속에 내버려둔  밭 치고는 그래도 빨갛게 익은 고추가 제법 눈에 띄었다. 잘 자라지 못한 키 작은 고추나무들이 지주도 제대로 해주지 않아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면서도 열매를 달고 있었다. 그 생명력이 대단했다. 들고 간  작은 바구니에 빨간 고추가 가득 찼다. 신통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미안했다.

"좀 잘 길렀으면 좋았을 것을."

후회가 밀려들었다.

빨간 고추 따내고 몇 개 안 남은 파란 고추도 따고 나서  고추나무를 뿌리째 뽑아냈다. 올해 고추와는 이별이었다. 헤어질 때는 항상 그렇듯 아쉬운 맘이 들었다. 제대로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지나온 인생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좀 더 잘 해볼 걸.

속으로는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 양이라니... 잘 길렀다면 우리 일 년 먹을 양을 어느 정도는 채웠을 지도 몰랐다.

"내년에는 세 고랑을 심어서 제대로 잘 길러볼까."

막상 내년에는 어찌될지 모르지만 당장은 정말 한 번 잘 해보고 싶다는 맘이 불끈불끈 솟았다.

인생에는 어떤 의미에서 '내년'이란 없다. 정말 한 번 더 잘 해보고 싶어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농사에는 '내년'이라는 것이 있다. 올해는 잘 안 되었을지라도 '내년'에 새로운 기대를 걸고 희망을 품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귀촌 #섬진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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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두계마을에서 텃밭가꾸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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