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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9월이 되고 길었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무더위도 물러가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야흐로 가을이 된 것이다.

하늘은 높고 구름은 두둥실 떠다니지만, 온갖 고민들로 속이 썩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날씨로 인한 불쾌지수는 낮아졌지만 삶이 팍팍해서 골치 아픈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하는 일마다 꼬이고, 현실은 시궁창 같고, 미래는 캄캄해서 한숨만 나오는 상황에 아파하는 사람도.

김호연 작가의 장편소설 <망원동 브라더스>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울한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연령대의 네 남자가 주요 등장인물인 이 책은 그들의 삶이 서로 엉키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웃픈(웃기면서 슬픈)' 상황들을 그려내고 있다.

망원동 옥탑방, 네 남자가 모여들기까지

 <망원동 브라더스>의 표지.
<망원동 브라더스>의 표지. ⓒ 나무옆의자
만화가인 영준은 망원동 옥탑방에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처지다. 10년 전 공모전에 당선되어 화려하게 출발했지만, 그 뒤로 이렇다 할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세월 속에 묻혀 버렸다. 그 때문에 제대로 된 일감을 구하지 못해서 몇 개월째 보증금에서 월세를 충당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캐나다에서 귀국한 김 부장은 영준의 데뷔작을 낸 출판사를 통해 알게 된 사이다. 누구보다도 영준의 첫 작품을 열렬하게 홍보하던 부장 직책의 직장인이었지만, 사고를 당한 뒤로 회사를 그만두었고 가족과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아내와 딸을 남겨두고 빈손으로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고, 영준의 월세 원룸이 있는 옥상에 텐트를 치고 덜컥 얹혀살기로 한다.

이 와중에 영준은 10년 전 자신을 가르쳐 준 만화 스토리 작가인 '싸부'와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동창의 결혼식에서 만난 싸부는 과거에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까지 될 정도로 수많은 히트작을 남긴 작가이지만, 이제는 초췌하고 빈곤한 모습으로 늙어 버렸다. 그럼에도 자존심만 강한 탓에 아내로부터 이혼을 요구당하자 무턱대고 가출(!)해서 영준의 옥탑방에서 기약 없이 신세를 지겠다고 '통보'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좁은 옥상에 두 사람을 떠안게 된 것만으로도 머리가 잔뜩 아픈 영준 앞에 나타난 또 한 명의 사내가 있다. 바로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 출신 후배 '재완'이다. 고시공부를 하던 그는 동네마트 개업식 날 만난 것을 계기로 영준의 집에 자주 들르다가 세 남자와 친해져 거처를 덜렁 옮기다시피 한다.

여기에 건물주인 복덕방 '슈퍼' 할아버지는 세입자가 왜 이렇게 늘었냐며 호통을 치고, 학교를 자퇴한 그의 손자는 몰래 담배를 피러 옥상을 찾는다. 10대 고교 중퇴생, 20대 고시생(재완), 30대 무명 만화가(영준), 40대 기러기 아빠(김 부장), 50대 황혼 이혼남(싸부)와 더 이상 자식들이 찾지 않는 60대 노인('슈퍼' 할아버지)까지. 연령대를 아우르는 남자들이 모여들어 왁자지껄 자신의 고민과 삶을 털어놓기 시작하면서 <망원동 브라더스>는 점입가경으로 나아간다.

한국 남성의 삶과 애환, 세대별로 총집합

"결혼은커녕 여자들이랑 데이트 한번 할래도 차는 한 대 있어야겠지? 차 없으면 요샌 여자들이 만나주지도 않는다며. 그리고 결혼하고 서울에서 살려면 최소 전세 1억은 있어야 돼. 거기에 애라도 낳아봐라. 맞벌이 안 되면 혼자서 한 달에 5백은 벌어야 할 걸. 그렇게 20년 키워서 니 아이 대학 보내려면 그땐 대학등록금이 한 학기에 천만 원도 넘을 거고. 지금 한 학기에 5백 정도 한대잖아.

아까 오다보니 반값등록금 어쩌고 데모하더라. 내 장담하는데 그거 절대 안 돼. 자, 그럼 대충 니가 앞으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려면 월 5백은 벌어야 미래의 자식 대학까지 보낼 수 있을 거야. 졸부로도 아니고 보통으로도 아니고 소박하게. 정확하게는 가난한 편으로 살면서 말이다." (본문 26쪽)

술자리에서 몇년 만에 만난 동창이 주인공 영준에게 '충고'라며 읊어대는 말이다.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의견을 쏟아내는, '꼰대질' 같은 지적에 영준은 그저 한숨만 쉬며 말없이 술잔만 비울 뿐이다. '잘못된 건 내가 아니라 지금 이 현실이야'라고 반박하고 싶지만, 만화가로서 성공하지 못한 그의 삶은 반론의 여지는커녕 대꾸할 의지조차 갖지 못한 초라한 신세이기 때문이다.

영준의 옥탑방에 모인 다른 세 남자도 마찬가지다. 김 부장은 한국에 돌아왔지만, 캐나다 생활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아내와 중학생 딸을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어 송금해야 하는 기러기 아빠다.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싶지만, 나이가 들어 취업 전선에서 밀려난 상태다. 결국 그는 아끼던 금목걸이까지 팔아서 연명하는 신세가 된다.

싸부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다. 스토리 작가로 성공한 삶이었지만 지나치게 길었던 슬럼프에 집안일만 하던 아내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작가의 길을 놓지 않았던 그는 끝내 성공적인 작품을 쓰지 못했고, 화가 난 아내가 이혼 서류를 들고와서 도장을 찍으라며 '황혼 이혼'을 당하게 될 위기에 놓인다.

"어느새 나는 내부의 검열을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돈 안 되는 것, 돈 안 주는 것은 할 자신이 없어졌다." (96쪽)

고시생 후배마저도 아무런 수입이 없자, 만화가 영준은 "작품다운 만화를 그려서 명성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꺾고 돈벌이를 위해 아이들의 교육교재인 '학습 만화'를 맡게 된다. 굴욕적이지만 당장의 생계를 위해 꿈을 접어야만 하는 상황. 과연 옥탑방에 모인 '망원동 브라더스' 네 남자는 참담한 현실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

지친 남자들을 위로하는 <망원동 브라더스>

이 소설의 매력을 꼽자면, 암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매우 재미있는 일화들을 통해 표현하면서 시종일관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활비를 마련하겠다며, 그리고 배를 채우기 위해 마트 개업 이벤트 '분식 빨리먹기 대회'에 참가하는 네 남자. 만취해 있다가도 옆집에 화재가 발생하자 자신이 썼던 이야기처럼 창문을 깨고 달려들어 모녀를 구하는 싸부. 그리고 망원동과 홍대 인근을 돌면서 다양한 안주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그들의 모습은 읽는 이로 하여금 침을 꼴깍 삼키게 한다.

궁상맞고 찌질한 인생이지만, 누구보다도 큰 꿈을 가진 네 남자의 일상. 주머니가 가볍고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주눅들거나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등장 인물의 모습은 연민을 느끼게 하면서도 공감을 이끌어낸다. 작가 특유의 유쾌한 문체는 무거운 현실을 밝으면서도 활기차게 표현해 냈다.

책장을 펴고 읽어 내려가다 보면, 옥상 위의 네 남자가 삼겹살과 소주를 내밀면서 위로해주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개성있는 캐릭터들도 사랑스럽지만, 고민을 함께하며 세대를 뛰어넘는 그들의 우정에선 묵직한 뭉클함이 느껴진다. "망원동 브라더스? 줄여서 부르면 MB가 되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 난 MB 싫으니까"라는 '싸부'의 실없는 농담은 피식 웃음을 자아낸다.

"문제는 해결하면 되죠. 원래 인생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라고 부장님이 그랬잖아요." (본문 164쪽)

대학등록금, 취업문제, 뜻대로 되지 않는 연애와 결혼생활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한국 남성이라면 누구든 망원동의 8평 옥탑방에 들러보자. 지친 당신의 일상을, 현실의 무거운 짐을 잠깐이나마 내려놓고서 웃게 만들어줄 '망원동 브라더스'가 당신을 반갑게 맞이해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망원동 브라더스> (김호연 씀 | 나무옆의자 | 2013.07. | 1만3000원)



망원동 브라더스 -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김호연 지음, 나무옆의자(2013)


#망원동 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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