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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자의 뇌> 책표지.
<승자의 뇌> 책표지. ⓒ RHK
<승자의 뇌>는 아일랜드의 인지신경과학자로 신경심리학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이안 로버트슨의 저작물이다.

이 책 앞 표지에는 "뇌는 승리의 쾌감을 기억한다"라는 부제와 "세계적 뇌과학자이자 신경심리학자가 들려주는 이기는 법칙!"이라는 홍보(?) 문구가 딸려 있다. '승리의 쾌감'과 '이기는 법칙'이라니. 이들 문구만 보면 뻔한 처세술을 최신 뇌 과학 연구로 포장해놓은 책인가 하는 의심이 간다.

차례와 서문을 읽어 보았다. 내 생각은 성급했다. 그저 그런 처세술 책으로 보기에는, 저자가 개괄하는 각 장의 주제들이 제법 묵직했다.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에 의해 승자 혹은 패자가 결정될까?"(1장), "우연이나 환경은 승리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2장) 등은 어지간한 심리학적 배경 지식을 갖추지 않고서는 건드리기 힘든 주제들이다. 뻔한 처세 담론의 주제가 되기에는 '격'이 놓다고나 할까.

실제로 저자가 각 장에 서술해 놓은 내용들은 풍성했다. 각 장의 주제에 맞아 떨어지는 다양한 실제 사례와 다채롭게 인용되는 연구 결과 등은 다채로웠다.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지적 자극과 정서적 즐거움이 주는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몇몇 아쉬운 대목이 없진 않지만, 요근래 읽은 책 중 첫손에 꼽아도 될 듯하다. "이 책을 손에 드는 순간 쉽게 놓지 못할 것"이라며 강력 추천한 존 아든(<당신의 뇌를 리셋하라>의 저자)이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똑똑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친구가 억대 연봉 받는 까닭

'똑똑하다'는 말이 있다. 어린 시절 이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해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며 자란 '나'의 삶은 왜 이렇게 지리멸렬할까. 아무리 봐도 똑똑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친구가 억대 연봉을 받는 까닭은 뭘까. '너는 머리가 좋아서 분명히 성공할 거야'라며 수시로 격려하던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은 대체 뭐였을까.

아이를 칭찬할 때는 그 아이가 '똑똑하다'고 칭찬해서는 안 된다. 어떤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 그 아이가 얼마나 끈기 있게 노력했고 또 창의성을 발휘했는지 말해주면서 칭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유전자적 숙명론의 저주를 그 아이에게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략) 유전자적이건 생물학적이건 간에 숙명론은 사람을 불구로 만들 수 있으며, 또한 많은 경우에 과학적으로 입증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개성과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고정불변의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운다. (65~68쪽)

지능지수가 높고, 스스로 자기가 똑똑하다고 믿는 아이들이 망가지는 경우를 본 적이 없는가. 평범한 아이일 뿐인데, 격려한답시고 '넌 똑똑한 아이야'라는 말을 꾸준히 한 결과 오히려 성적이 계속 떨어져서 의기소침과 슬럼프의 덫을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례를 본 적은 없는가. 저자의 말처럼, 별다른 근거 없이 내뱉는 '똑똑하다'는 말 대신 아이가 보여 준 노력과 태도, 결과물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에 초점을 맞춰 칭찬을 해야 하는 이유다.

이번에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열쇳말인 권력 문제를 살펴보자. '침묵 효과(mum effect)'와 '권력-간격 지수(power-distance inded, PDI)'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침묵 효과는 사람들이 상위 권력자의 부당한 명령이나 지시를 알고도 응분의 대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침묵을 지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저자는 러시아나 소련과 같이 권력이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는 계급적인 국가나 조직에서는 침묵 효과가 중요한 기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PDI는, 어떤 조직이나 사회에서 권력을 덜 가진 사람들이 권력이 불평등하게 배분되었음을 인정하는 정도를 수치화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PDI가 높은 국가에서는 서열이 높은 사람은 상당히 많은 권력을 가지는 반면에 서열이 낮은 사람은 권력을 거의 가지지 않는 게 당연시된다. 이에 따라 서열이 낮은 사람들은 바로 그 상태(지위) 때문에 조직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것을 윗사람에게 알리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침묵 효과가 일어나는 배경이다.

낮은 PDI와 이에 따른 침묵 효과는 조직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를 위해 든 사례 중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사례는 시사적이다. 블레어 총리는 재임 중 소규모 관료 회의체인 '소파 내각'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저자에 따르면, 블레어 전 총리가 영국 여론이 압도적으로 반대하던 이라크 침공을 결정한 게 그 '소파 내각'이었다.

'소파 내각'에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블레어 내각의 장관 중 하나였던 크레어 쇼트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 국무회의는 '수다를 떠는 자리'와 다름 없었다. 쇼트는 '소파 내각'에 이라크 전쟁 관련 안건이 상정되자 전쟁의 불법성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야유와 조롱이었다. 저자는 당시의 상황을 쇼트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총리가 조용히 있으라고 말하면 그냥 시키는 대로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블레어 총리의 사례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저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위험들 가운데 하나는 권력이 강한 지도자가 거둔 뒤에 그의 혈액에 분출되는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의 하나. 저자에 의하면 '도파민'과 함께 행동 지향적인 목표 달성 우선주의자들에게서 많이 분비됨)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테스토스테론에 의한 승리의 도취감이 매번 더 강한 자극(승리)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저자가 심리적으로 강한 권력욕을 가진 정치 지도자가 제도적으로 설정된 내각이나 위원회 조직을 물리치고 소규모 핵심조직을 통해 정부를 운영하려 드는 경향이 강하다고 보는 이유다.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대한민국에는 '7인회'라는 '음험한' 이름을 가진 모임이 있다. 7인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계기로 박 대통령을 돕는 7명의 원로 자문그룹을 말한다. 얼마 전 박 대통령은 이 7인회의 '큰형님' 격에 해당하는 김기춘 전 의원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한때 박 대통령이 이사장으로 있던 정수장학회의 1기 장학생으로 정수장학회 출신 모임인 '삼청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7인회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명백하다. 현재 7인회 멤버 중 요직을 맡고 있는 이는 김 비서실장과 더불어 강창희 국회의장, 현경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이다. 7인회 멤버는 아니지만,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고위 인사도 많다. 강창희 국회의장의 육사 동기인 남재준 국가정보원장과, 김기춘 비서실장의 경남중 후배인 정홍원 국무총리 등이 그들이다.

이들 모두가 청와대에 모이는 '거국 회의'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마냥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상상이다!). 그 '거국 회의'가 침묵 효과가 지배하는 블레어의 '소파 내각'처럼 되지 말란 법이 있을까. 박 대통령은 크고 작은 사안에 직접 '깨알 지시'를 내리고,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업무 스타일을 갖고 있다. 국무회의에서 장관들이 단정한 자세로 박 대통령의 말을 듣거나 고개를 박고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이유다. 수만 명이 켜든 촛불과 시국선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박 대통령의 모습도 이런 배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토니 블레어는 '테스토스테론의 종결자'

토니 블레어는 '테스토스테론의 종결자'다. 하지만 그는 영국의 민주주의 체제 덕분에 불명예스러운 퇴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면 민주주의가 허약한 나라는 어떻게 하나. 저자는 권력자 스스로가 자신의 권력욕을 감독하고 검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아('나')에 집중된 이기적인 권력욕과 '우리'를 지향하는 이타적인 권력욕이 균형을 맞추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진정한 승자'의 태도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조금 한가하게 들린다. 젊은 20대부터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고, 정치에 본격 입문한 후에는 '선거의 여왕'이 되어 늘 승리감을 만끽하며 지냈을 박 대통령에게, 가령 저자가 제안하는 "나는 지금 권력에 도취되어 있는 게 아닐까?"라며 자문(自問)을 요구하는 일은 무리가 아닐까. 수많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박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불안하게 그리는 이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아주 흥미로운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수백만 명의 중립적인 독일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아주 작은 부정적인 행동을 하도록 술책을 부린, 저자가 '악당 골목대장질'로 이름 붙인 고전적인 수법이 그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히틀러는 평범한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유대인에 대해 불편함을 갖도록 하는 법률들을 차례로 통과시킨다. 이를 통해 히틀러는 국민들의 뇌에 유태인은 부정적인 족속이라는 생각을 집어넣으려 했고, 마침내 성공한다. 평범한 독일인이 평범한 유태인에게 행사한 작은 권력과 그로 인한 자잘한 '승리의 쾌감'이 역사상 최악의 유태인 학살이라는 광풍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종북', '광주', '빨갱이' 같은 말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한민국의 지배 언론은 이들이 집회라도 할 양이면 오만상을 찡그린 채 예상되는 불편과 피해를 부풀려 보도한다. 이들과 평범한 일반 시민을 분리하여 이간질하려는 이런 수법은, "대한민국의 경찰이냐? 광주 경찰이냐?"라는 질문에서 거의 '예술적 경지'에 이르렀다. 이 악질적인 '악당 골목대장질'에 어떻게 맞서야 하나.

2011년 초에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분 시민혁명의 불길은 교육을 통한 권력 부여와 '데모스(사람)'을 위한 '크라티아(권력)'에의 열망 사이의 상관성을 강력하게 증명한다. 교육을 잘 받았으며, 또 인터넷을 통해서 자기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상에 목마른 청년들은 독재 정권이 휘두르는 숨 막히는 권력을 전복시키기 위해 노력할 권력이 자기들에게 부여되었다고 느꼈다. (354쪽)

한 마디로 교육과 네트워킹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뜨거운 교육열과 촘촘한 인터넷 망을 갖춘 우리나라의 미래는 마냥 암울하지만은 않다. 문제는 어떤 교육이며, 인터넷 문화를 통해 우리가 만들어나가야 하는 게 무엇인가다. 우리 모두의 성찰과 지혜가 필요한 대목이다.

덧붙이는 글 | <승자의 뇌> (이안 로버트슨 지음 | RHK | 2013. 8. 2 | 390쪽 | 1만 5천 원)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승자의 뇌 - 뇌는 승리의 쾌감을 기억한다

이안 로버트슨 지음, 이경식 옮김, 알에이치코리아(RHK)(2013)


#<승자의 뇌>#이안 로버트슨#박근혜 대통령#7인회#진정한 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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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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