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인전(이제는) 못 심것다."


한 시간도 넘게 트럭 위에서 고추포대를 안고 있던 박화영(80, 충남 예산군 광시면 월송리)옹이 긴 한숨을 쉬며 내뱉은 말이다.

지난 25일 새벽 충남 예산공설운동장엔 올해 들어 첫 고추시장이 열렸다. 대술, 신양, 광시 산밭의 고단한 일상이 마대포대에 꽁꽁 묶여 트럭에 실려 나왔다.

 주민들이 첫 고추시장에 나와 고추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주민들이 첫 고추시장에 나와 고추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 이재형

그런데 고추포대를 벌려놓고 앉은 농민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뭐, 최고 존게(좋은게) 2000원, 작년 반 값도 안되네…."

첫 장에 나온 물건이 ㎏당 1800원에서 2000원에 흥정됐다는 말에 맥이 풀린 분위기다. 그런데도 장사꾼(중도매인)으로 보이는 몇몇 무리들은 더 깎아볼 요량으로 멀쩡한 고추를 쥐었다 폈다 하며 트럭 주변을 맴돌기만 한다.

금오산 꼭대기가 번해지더니 어둠이 걷힌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대로 싸안고 가고 싶어도 그게 쉽게 되질 않는다.

"두 노인네가 죙일 기어댕겨야 겨우 두 포대 따는디…. 고생 바가지다. 금이라도 좋아야 어려운 줄 모르는데 내년엔 진짜 쪼금만 심어야겠다."

대술 마전리에서 500평 고추농사를 짓는다는 송중한씨 부부는 내년 농사를 줄이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면서도 "올핸 워낙 풍년이긴 혀. 저짝 강원도나 전라도는 물을 말았다는디 여긴 마른 장마라 (고추가) 원첸 잘됐어" 하며 위안을 삼기도 한다.

 지난 7월 25일 예산군공설운동장에서 올해 첫 고추시장이 열렸다. 새벽 4시부터 장에 나온 농민들이 고추포대를 벌려 보이고 있다.
지난 7월 25일 예산군공설운동장에서 올해 첫 고추시장이 열렸다. 새벽 4시부터 장에 나온 농민들이 고추포대를 벌려 보이고 있다. ⓒ 이재형

송씨와 나란히 트럭을 세우고 고추포대를 벌려 놓고 있던 중년의 아낙은 속이 상했는지 "쥔네(주인네)는 난디, 도대체 언놈이 고추금을 매긴겨. 이러키 달라는 대로 주니께 계속 싼기여. 버팅길 때까진 버티야 하는디. 여기 나온 농사꾼끼리 합심해야 되여" 하고 날을 세운다.

벌써 오전 6시가 다 돼간다. 파장 분위기인데 몇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장 안으로 들어선다. 집에서 먹을 거라 일찍 사서 햇빛에 깔끔하게 말리려고 하는 진짜 어머니들이다.

"어머나, 왜 이러키 싸댜."

그 한마디에 농사꾼 쓰린 속도 조금 풀리는 듯하다. 2000원 밑으로 절대 안 팔겠다고 먼 산만 쳐다보고 앉아 있던 박화영옹의 고추 4포대도 팔렸다.

"㎏에 2000원씩 180㎏, 그럼 36만 원 맞죠?"

한 아주머니가 스마트폰을 꺼내 계산을 마치더니 "만원 깎아서 35만 원 드릴게요" 하니 박옹이 선뜻 고추를 내주고 무거운 어깨를 턴다.

한편 예산고추시장은 읍내장날(5, 10일)에는 예산군공설운동장에서, 역전장날(3, 8일)에는 예산능금농협 주차장에서 열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예산지역신문 <무한정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고추시장#예산고추시장#예산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