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전병원인민군 제3사단 임시야전병원은 구미면 임은동에 있었다. 구미 '임은동(林隱洞)'은 동네이름처럼 낙동강 옆 숲에 폭 파묻힌 마을이었다. 야전병원 입지로 아주 알맞은 천연 지형이었다. 마을 가운데 대나무 숲에 싸인 큰 기와집은 수백 년 된 고택으로 구한말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 생가였다. 그 집은 야전병원 본부 겸 외과 수술실이었고, 이웃 초가집들은 환자 회복실 겸 야전병동으로 쓰고 있었다.
장 상사는 흰 가운을 입은 인민군 중좌(영관급 계급) 문병철 병원장에게 귀대 보고를 한 뒤 김준기와 손만호 전사에게 전입을 신고케 했다.
"전사 김준기는… ""전사 손만호는… ""고만 됐수다."두 전사가 잔뜩 겁먹은 채로 신고를 하는데 문명철 중좌가 미소를 띠며 만류했다.
"동무들, 먼 길 오느라구 수구(수고) 햇수다. 이곳은 최전선인 낙동강이야. 강 건너 산 너머에는 국방군 아새끼들과 미제 놈들이 개미떼처럼 우글거리고 있디. 요기는 미제 대포 포탄이나 쌕쌕이 폭탄에 죽느냐, 사느냐 목숨이 한 순간에 왔다리 갔다리 하는 최전선이야.""네, 알갓습네다."두 전사는 합창하듯 대답했다.
보직 명령"내레 살아 돌아갈디, 동무들이 살아 돌아갈디 전쟁터에는 거(그) 누구두 알 수 없디. 우리는 영광스럽게두 조국해방전쟁 전사로 요기에 와서. 내레 두 동무의 무운장구를 빌가서. 미제 침략자들을 처부수구 꼭 살아 영웅 훈당(훈장)을 받아 고향에 돌아가라우. 우리 야전병원에 복무하는 동안 아무토록 부상당한 많은 동무들의 생명을 살레내구.""네! 알갓습네다! 병원장 동무의 명넝(명령) 받들갓습네다."두 전사는 부동자세로 동시에 크게 대답했다.
"아직 병원 일에 서툴 테니까 김준기 동무는 최순희 동무 조수로, 그리고 손만호 동무는 장 동무를 보좌하면서 행정반 일을 보라요."문명철 병원장은 즉석에서 두 신병에게 보직을 주었다.
"이봐, 최 동무!"문병철 중좌가 야전병원 수술실을 향해 소리쳤다.
"네, 병원장 동무!"새빨간 적십자 완장을 두른 한 여전사가 수술실에서 재빨리 사뿐사뿐 다가왔다.
"김준기 동무를 최순희 동무 조수로 발령을 냈으니께 동무가 잘 알쾌(가르쳐) 주라요.""네! 알겠습니다. 병원장 동무!""내레 최 동무 일이 벅탄 것 같아 조수로 발령냇디.""넷! 감사합니다."최순희가 문명철 병원장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대답하는 말씨가 서울 말이었다. 준기가 그 얼마나 동경했던 서울 말씨였던가. 최순희는 곱상한 얼굴에 몸매가 날렵하고 아주 당차 보였다. 순간 준기의 숨이 막힌 듯하고, 그의 심장은 마구 뛰었다.
첫 인사"두 사람이 멀건히 처다보디만 말구 김 동무가 최 동무에게 먼저 인사하라우. 최 동무는 김 동무보다 일주일 먼저 입대한 선임이디.""기건(그건) 기래. 오뉴월 하루 볕이 어딘데. 최 동무는 우리가 대전에 있을 때 전입해 왔디." 장 상사의 말에 문명철 병원장이 훈수하듯 말했다.
"…김준기 전사, … 전입 … 인사드립네다."
김준기는 얼굴이 붉게 물든 채 거수경례를 하며 떠듬거렸다.
"반갑습니다. 최순희 전사예요."최순희는 싱긋 미소지으며 거수경례로 답례하며 대꾸했다.
"평안도 영벤 촌놈이 서울 아가씨 앞에서 아주 단단히 얼어버렷구만."장 상사의 말에 김준기의 얼굴은 더욱 새빨갛게 물들었다.
"잘 … 부탁드립네다." "네, 수고해 주세요. 오히려 제가 잘 부탁드려요."두 사람의 눈길이 다시 마주쳤다. 순간 서로 멈칫 놀라는 눈치였다.
'저 쪼그만 어린 동무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숨이 막힐 듯 깜찍하게 예쁜 데(저) 서울깍쟁이 아가씨를 최전선 낙동강 야전병원에서 만나다니….'서로 간 연민과 놀람의 눈빛이었다. 장 상사와 문 병원장은 두 전사가 첫 인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작품 배경 취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지인 및 애독자들이 제공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