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속의 섬, 비양도를 걷습니다. 비양도는 몇 해 전까지는 우도와 가까운 섬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조그만 다리가 두 섬을 이어 놓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섬을 향해 걸어갑니다. 섬을 잇고 있는 다리 위에서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습니다. 작은 수레를 끌고 오는데 꽤 고단해 보이더군요.
수레에 무거운 짐이라도 들었을까요? 가까이 다가가 수레 안을 쳐다봤습니다. 짐 많지도 않더군요. 우뭇가사리 한 포대가 놓여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손수레 끄는 모습, 힘겨워 보인 이유가 뭘까요? 낯선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모진 세월 묵묵히 수레 끌며 가족을 지키던 모습이 겹쳐집니다. 할아버지에게 사진 몇 장 찍어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다행히 쉬이 허락해 주십니다. 눈을 카메라 렌즈에 대고 할아버지를 바라봅니다. 이마에 패인 깊은 주름과 굵은 손마디 그리고 두툼한 손톱이 보입니다.
그 모습 보고 있자니 또 한 번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아버지 모습들은 왜 이리도 닮았을까요? 그렇게 섬과 할아버지 모습 카메라에 담고 비양도로 향합니다. 몇 걸음 옮기는데 뒤쪽에서 할아버지가 나지막이 부릅니다. 고개 돌리니 잠시 머뭇거리던 할아버지는 일행을 향해 사진 한 장 줄 수 없냐고 묻습니다.
늙으신 할아버지, 사진 받았다면 어디에 썼을까요?난감합니다. 디지털카메라에 담은 얼굴이라 곧바로 사진을 뽑지 못합니다. 이리저리 할아버지에게 사진 전할 방법을 찾았지만 답이 없습니다. 결국,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돌아섰습니다. 할아버지도 아쉬운 듯 가던 길을 걸어갑니다. 비양도로 향하는데 귓가에 할아버지 음성이 계속 들려왔습니다.
그 분은 사진을 받았다면 어디에 썼을까요? 왠지 가슴이 답답해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해가 저물어 갑니다. 비양도 일몰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발걸음을 빨리 움직였습니다. 종일토록 걸어 다리 힘은 없지만 이 섬은 꼭 들러 보고픈 곳입니다.
잠녀들 삶터인 바다밭 다스리는 요왕신(龍王神)과 어부 지키는 선왕신(船王神) 모시는 '돈짓당'을 봐야합니다. 우리나라 정기가 모두 모였다는 봉수대에도 올라야지요. 아름다운 상상을 하며 비양도를 향해 잰걸음을 놓았습니다. 섬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한참을 거닐었습니다.
우도봉에서 바다보고 동안경굴까지 훑어보려니 바쁩니다
11일 오전, 늦은 아침을 챙겨 먹고 우도봉으로 향합니다. 구멍 숭숭 뚫린 검은 돌담 너머 바닷바람이 불어옵니다. 볼을 스치는 바람이 상쾌합니다. 어미젖 실컷 먹은 망아지 한마리가 풀밭에 코 대고 잠을 잡니다. 낯선 이 경계하느라 연신 눈을 떠보지만 몰려오는 나른함을 이기지는 못하는군요.
결국, 풀밭에 벌러덩 드러눕습니다. 섬에서는 늘 벌어지는 모습이지만 뭍에서 건너 온 사람 눈에는 색다른 풍경입니다. 잠든 망아지를 뒤로 하고 부지런히 돌담길 걸었습니다. 등에 땀이 맺힐 즈음 멀리 우도봉이 보입니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니 영락없는 사자 모습입니다.
제주의 5월, 사람들로 들썩입니다. 이 섬도 매 한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우도봉 올라 망망한 바다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호흡 한 번 크게 내뱉고 봉우리 내려가 재빨리 버스에 몸을 싣습니다. 배 시간 맞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그 와중에 음식을 챙겨먹습니다. 서둘러 주변을 둘러 보다보면 배가 고프기도 하겠지요.
우도봉 내려오는 길, 식당 입구에 '5분이면 뚝딱'이라는 펼침막이 걸려있습니다. 추측컨대, 5분 만에 음식이 나온다는 말이겠죠. 바쁜 관광객에게 딱 맞는 음식점입니다. 버스 타지 않고 우도 재빨리 둘러보는 방법 또 있습니다. 'ATV'라는 네 바퀴 오토바이를 타면 됩니다.
굉음 내며 섬을 둘러보는 방법인데 나름대로 멋있습니다. 바닷바람 맞으며 달리는 기분 나쁘지 않겠지요. 하지만 걷는 사람에겐 여간 신경 쓰이는 물건이 아닙니다. 차라리 자전거를 타면 어떨까요? 모두들 우도에서 시간에 쫓깁니다. 섬이 만든 멋진 풍경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숨비소리와 보말의 영롱한 빛, 걷는 자에게 베푸는 하늘의 은혜안타깝지만 사람들 탓할 일 아닙니다. 제주 관광 일정이 그들을 바쁘게 만들었으니까요. 반면, 걷는 자는 아름다운 기억을 눈과 귀에 담습니다. 우도 등대에 올라 태평양을 하염없이 바라봤습니다. 거센 바닷바람 맞으며 노란 꽃 피운 엉겅퀴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동안경굴 앞, 드넓게 펼쳐진 검은 모래밭에 손을 푹 집어넣어 보기도 했습니다. 쉬엄쉬엄 걸으니 다양한 소리가 들립니다. 줄지어 늘어선 돌담 휘감는 바람소리도 들었습니다. 태평양에서 달려온 파도소리가 경쾌합니다. 비바리들 숨비소리는 어떻고요. 이 모든 소리를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까요?
우도의 색도 곱습니다. 꼬마 아가씨가 바위틈 들춰 따낸 '보말'의 영롱한 빛깔도 봤습니다. 깨끗한 바다에서 자란 거북손과 갯바위를 다양하게 물들인 해초도 만났고요. 물결에 이리저리 몸 흔드는 미역과 우뭇가사리는 어찌 그리 고울까요. 이 모든 풍경, 걷는 자에게 베푸는 하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우도가 만들어 내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저 멀리 또 다른 섬이 보입니다. 비양도입니다. 그곳에서 늙으신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죠. 사진을 찍었더니 한 장 달라던 그분은 어디로 가는 길 이었을까요? 할아버지에게 아쉽게 사진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어둠이 서서히 돌담 사이로 스며들 즈음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하루의 고단함, 잊지 못할 많은 기억을 담았기에 충분히 보상 받았습니다. 내일은 어떤 모습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을지 못내 기대됩니다. (기사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