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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서른둘인 나의 삶, 항상 도망치듯 살아왔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도망칠 때마다 매번 서툴기 짝이 없는 이유들을 늘어놓았던 것도 부정해선 안 될 것 같다. 이 글을 아버지께 보여드릴 수는 없겠지만, 이 글을 통해 내 지난 과오들을 깨끗이 인정하고, 지금의 뜨거운 감정을 새로운 삶의 동력으로 삼고 싶다.

언제 어디서부터 아버지께 기쁨보다는 실망을 주는 아들이 되어버렸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 한다. 아마도 육군 훈련소에서 불평, 불만으로 가득한 첫 편지를 보내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그때였던 것 같기도 하고, 수능시험을 마쳤다는 해방감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동이 틀 때야 집으로 기어 들어오던 그때였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뒷전에 밀어 놓고, 전공과는 상관이 없는, 흥미 위주의 책들만 닥치는 대로 읽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만취한 채 집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아버지께선 그렇게 다니고 싶어했던 대학, 그 문 앞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 하셨으니 더더욱 이런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우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형편 탓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나, 아버지는 검정고시를 치러 고등학교 졸업 학력을 얻을 수 있었고, 그후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초등학교 교사로 선발되는 영예까지 누리셨다. 그러니 그렇게 자수성가한 아버지 입장에서는 부족함 없이 잘 키워낸 아들 녀석이 흥청망청 젊음을 흘려보내는 것이 얼마나 한심했을까 감히 그 마음 헤아려보는 것도 쉽지가 않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2년간 현역으로 군복무도 마쳤고, 1년간 캐나다로 영어 연수도 다녀왔다. 졸업만 하면, 그럴 듯한 직장에 들어가 반듯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너무 쉬운 생각이었다. 그렇게 자리를 잡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점 다가올 아버지의 퇴직이 더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그분을 위해 해드릴 수 있는 것도 없는 상황인데, 스스로의 앞가림도 힘겨워하던 내가 감당치도 못할 걱정을 혼자 떠안고 있었던 거다.

아버지께도 꿈이 있었다니... 저는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퇴임 몇 해 전부터,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다니시며 목사로서 제2의 삶을 시작하는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 물론 그 일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저 흥미를 갖고 계시던 학문으로써의 접근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가족들에게 어떤 심적 동요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당신의 열망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를 비롯한 가족들은 아버지의 생각과 계획을 알고 싶었다. 왜 교사로서 정년 퇴임을 마다하고, 1년이라도 빨리 학교를 그만두고 싶으신 건지 여쭤보았다. 아버지의 대답은 놀라웠다. 어머니도, 형도, 나도 아버지의 꿈 같은 건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내 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내가, 아버지께도 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거다.

"아빤, 처음부터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어.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초등학교 시절부터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 하지만 네 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혼자 돌봐야 하는 입장에서, 부모님께 목사가 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임용고시에 합격하게 되었고, 교사로서, 공무원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게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이어져온 것뿐이지, 늘 마음 속에는 목회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말씀을 전하고 싶은 꿈이 있었어. 그래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새 삶 잘 시작하고 싶어. 이제 너희도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곧 직장을 구해 각자 생활해나갈 수 있을 테니, 아빠의 계획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우리 가족 모두는 그의 계획에 반대표를 던질 수 없었다. 단, 어머니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절대 혼자서 교회를 개척,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선한 뜻이 악용될 수 있는 여지 자체를 남겨두고 싶지 않으셨던 거다. 아버지도 오랜 고민 끝에 동의를 하셨고, 그후로 군대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봉사와 선교를 주로 행하는 교회에서 협력 목사로 일을 하시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짧은 직장생활을 반복하다 오랜 꿈이었던 남미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공부하기도 했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을 여행하였으며, 브라질에서는 1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경험들이 내게 특별하다거나, 정말 눈부신 성장 같은 것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지만, 남미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 하나 원고로 정리해보고 싶어졌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아버지, 감사합니다


서너 달이 걸려 200페이지 정도의 텍스트와 100컷의 사진으로 압축이 되었다. 나는 이 글들을 꼭 책으로 묶어내겠다는 목표를 갖고, 국내 50여 개 출판사에 원고를 송부하였다. 절반 정도는 계약할 수 없다는 거부 의사를 밝혀왔지만, 10개가 넘는 회사로부터 원고에 대해 긍정적인 평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뿌듯하고, 뭔가를 이뤄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정말 거짓말 같이 세 곳의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저마다 좀 더 나은 조건과 출판사가 가진 장점들을 설명하며 계약을 하고자 했다.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을 내린 한 곳의 출판사에서 나의 첫 책을 출판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시며, 내 책을 광고하기 시작하셨다. 책 내용에는 아버지가 갖고 계신 기독교적 가치관에 반하는 점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목사 아버지의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 굳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으셨다. 그게 아버지의 직업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될지 몰라도, 아들의 첫 책이 단 한 권이라도 더 팔렸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물론 이 서투른 책 한 권이 내 인생을 바꿔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판매량이 쌓여야 내가 생각하고 있는 다음 책들도 빛을 보게 될 것이니, 아버지께서 직접 홍보해주시는 게 정말 감사한 일이다.

아버지의 마음이 그런 것인가 보다. 당신에게 튈 불똥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가늠할 수 없어도, 그것이 아들의 앞날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애써 피하지 않고 맞아주는 것. 이 책이 내게 돈을 가져다주지 않아도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내 힘으로 펴낸 책 한 권을 아버지 앞에 보여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고, 그저 뿌듯할 뿐이다. 정말 그것으로 충분하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엔 이렇게 한 줄을 더 적어 넣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나의 아버지 김○○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덧붙이는 글 | '만화가 박재동 <아버지의 일기장> 출간 기념 기사 공모' 응모 글입니다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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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스 에디터로 활동하며 스포츠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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