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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일)은 어버이날입니다. 저 역시 오늘은 누군가의 '아들'이고 또한 누군가의 '아버지'입니다. 직접 찾아뵙지 못하더라도 전화하여 안부도 여쭙고 용돈과 선물 조금 보냈다며 미안해 하면, 부모님은 그저 고맙다며 웃어주는 날입니다. 하지만 이런 소박한 일상마저 그립고 아파서 우는 분들이 계십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98년 12월 1일, 군에서 하나뿐인 외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의 사연입니다.

초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98년 6월 23일, 고정순씨의 아들 이승원씨가 입대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채 반년이 지나지 않은 그 해 12월 1일, 늦은 밤에 한 통의 전화가 집으로 걸려 왔다고 합니다.

"여기 부대인데 이승원 일병 집이죠?"

저녁 9시 뉴스가 막 끝나던 순간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15년간의 끔찍한 악몽이 시작됨을 알리는 전화였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군 입대 전날 친구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비좁은 방에서 자고 훈련소까지 동행할 정도로 사교성이 좋았던 그 아들이, 어려서부터 장사하는 엄마를 밤늦게까지 기다리며 웃음을 줬던 그 아들이 자살했다는 전화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으로도 다 설명하지 못할 고통이었다고 합니다. 충격 때문에 사지가 마비되어 쓰러진 어머니는 뒤늦게야 정신을 수습하고 먼저 출발한 남편을 쫓아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고 합니다. 부대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1시. 이미 싸늘하게 식은 아들은 옷이 모두 벗겨진 채 매트리스 위에 놓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핏자국 하나 없었던, 아들이 죽었다는 자리

 군의문사 유가족들이 2008년 11월 20일 오후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군의문사 희생자 합동 추모제를 열어 군의문사위 폐지 및 과거사 관련 위원회 통폐합에 반대하고 있다.
군의문사 유가족들이 2008년 11월 20일 오후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군의문사 희생자 합동 추모제를 열어 군의문사위 폐지 및 과거사 관련 위원회 통폐합에 반대하고 있다. ⓒ 남소연

이 순간에 미치지 않을 어머니가 있을까요. 남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어머니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이승원 일병  밑에 두 살 아래 여동생이 있었지만 어릴 때 잃었다고 합니다. 가난 때문에 먹고 살기 힘들어 밤늦게까지 장사에 매달리다보니, 그만 병이 깊어진 뒤에야 딸이 소아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남은 아들에게 의지하며 희망으로 삼았는데 이제 그 아들마저 잃은 것입니다.

"승원이가 죽은 그날이 일병으로 진급한 날이었어요. 승원이가 이제 일병 진급하면 휴가도 금방 나올 수 있다며 좋아하면서 전화했는데 그런 아이가 왜 그날 죽었다는 것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아들이 죽기 열흘 전에 면회를 했는데 그때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이유로, 왜 죽었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군 부대 관계자들은 이런 어머니의 의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총으로 자살했다는 아들이 마지막으로 입고 있었던 옷이라도 보여 달라며, 아니면 사고 현장이라도 보여 달라며 매달렸지만 모두 묵살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틀이 지나서야 군 부대 측은 유가족 중 딱 4명만 허용하겠다며 선심쓰듯 현장으로 안내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간 사고 현장이라는 곳에는 아무 흔적이 없었습니다.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고 합니다. 의문을 제기했지만 역시 무시당했다고 합니다.

군 부대 측에서 한 말은 오로지 "장례를 빨리 치르라"는 닦달 뿐이었답니다. 데려갈 때는 '조국의 자식'이라고 하더니 왜 죽었냐는 물음에는 답도 없이 '당신 자식이 못나서 자살한 것'이라며 하루빨리 장례만 치르라고 윽박만 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억울해서 장례를 못 치르겠더라고요. 아이가 군 복무를 하다가 죽었는데 그 부대 높은 사람들 단 한 명도 저에게 위로 한마디 해 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분해서 장례를 치를 수 없고 그렇게는 나도 못 살겠다고 했어요. 말리는 사람에게는 다 나가라고 했어요. 나 혼자라서 남아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하니 애 아빠가 옆에서 같이 싸우자고 하더라고요."

어머니 인생 15년을 바쳐 밝혀낸 '아들의 진실'

 이승원 일병의 어머니 고정순씨.
이승원 일병의 어머니 고정순씨. ⓒ 장윤선

그날부터 어머니는 '사실상' 거리에서 살았습니다. 150cm가 될까 말까한 그 자그마한 체구의 어머니가 그동안 먹고 살려고 해왔던 '연탄 배달'마저 던져 버리고 삭발하고 소리지르며 싸웠습니다. 거리에서, 군 부대 앞에서, 그리고 국방부 철문 앞에서 아들이 왜 죽었는지 알려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1999년 6월에는 용산 국방부 정문 앞에 관을 놓고 단식농성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영정 사진 하나만 든 채 "왜 죽었는지 이유를 알려달라"며 싸우고 또 울었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처음 만난 때가 그때였습니다. 1998년 12월 천주교 인권위원회 활동가로 일할 당시 명동 사무실로 찾아와 하염없이 울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 어머니를 뵈며 이 불쌍하고 안타까운 어머니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같이 눈물 흘리곤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군 의문사위로, 행정법원으로, 그리고 권익위원회를 찾아다니며 무려 15년을 싸웠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15년의 모진 고생 끝에 찾아낸 진실은 참담했습니다. 어머니의 아들은 선임병에 의해 일상적인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했고, 암기 사항을 못 외운다는 이유로 장시간 머리 박기를 당한 것도 모자라, 그 상태에서 발로 걷어 차이는 등 잔인한 폭력에 매일 시달려야 했습니다. 선임병들은 아들의 관물대를 뒤져 물건과 금품을 갈취하는가 하면 밤에는 몸을 더듬는 '성추행'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장난'이라고 변명했습니다.

이러라고 군대에 아들을 보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폭력과 가혹행위, 성추행을 방치하고도 아무 잘못이 없단 말입니까. 또한 이것을 못 견뎌 죽으면 '모두 죽은 자의 잘못'입니까. 이런 선임병의 '범죄 행위'와 '성추행'을 견디는 것이 애국심이고 조국에 충성하는 것입니까. 어머니는 스스로 자신의 몸에 방아쇠를 당겨서라도 이 고통을 끝내고 싶어 했을 아들의 상처를 떠올리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과하지 않는 국방부

이렇게 진실은 밝혀졌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부대 내 가혹행위를 인정하고 선임병까지 구속되었지만 국방부는 '자해 사망'했다며 이승원 일병의 '순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미안하다'고, '당신의 귀한 아들을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죄송하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싸운 세월이 지금까지 만 15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2013년 3월 29일. 어머니는 아들 이승원 일병을 만 15년만에 국립대전묘지에 안장할 수 있었습니다. 변호사와 다른 군 의문사 유가족의 도움을 받아 끝내 순직을 인정해주지 않는 국방부와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고 이후 5번의 승소와 패소, 대법원 파기 환송을 거쳐, 눈물과 절망 속에서 '순직 결정'을 얻었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미안했어요. 우리처럼 못난 부모를 만나 승원이가 불쌍하게 죽은 것 같아 미안했고 또 군대는 당연히 보내야 하는 줄 알고 아들을 군에 보낸 미련한 엄마 때문에 죽은 것 같아 미안했어요. 그런데 더 서러운 것은 우리처럼 돈도 없고 힘도 없으니까 국방부와 국가보훈처도 무시하는구나 싶어 가장 속상했고요."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어요. 전 군대가서 아들이 죽을 거라고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전쟁이 아니면 당연히 살아서 돌아오는 줄 알았거든요. 이런 줄 알았다면 누가 자식을 군대에 보내겠어요. 아들이 만약 또 있었다면 저는 차라리 감옥에 보내지 군대에는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2013년 3월 29일. 대전국립묘지에 세워진 아들의 위패를 보며 어머니는 한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불쌍한 아들을 위해 울었고 이곳에 오기 위해 거리에서 싸워왔던 고통이 떠올라 억울해서 울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의문이 있다고 합니다. 군에서 아들을 잃은 불쌍한 부모에게 왜 이 나라 국방부가 이렇게 모질게 대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시키는 대로 아들 낳고 키워 가르쳐서 군대에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부모 대신 내 아들을 잘 보호해 줘야할 이 나라와 국방부가 전쟁도 없었는데 아들을 죽게 한 후 이 모든 것을 다 '못 난 부모 책임'이라는 것인지 너무나 억울하다고 합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징병제'를 폐지하라고 말합니다.  내 자식 내 품 안에서 잘 보듬어 살 테니 죽고나면 책임 못 지겠다는 국방부가  강제로 끌고 가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할 말이 없어 "그래도 이제 아드님을 국립묘지에 안장했으니 마음은 좀 놓으시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가슴을 아프게 칩니다.

"저는 이제 뿌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아들이 억울하게 죽었을 때는 그 한과 억울함을 풀어 국립묘지에라도 안장하자 싶어 지금까지 싸웠는데 이제는 제 희망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 이제 자식이 없어요. 그런데 밥은 먹어 뭐하고 물을 마시면 뭐하나 싶습니다. 자식 없는 부모가 무슨 인생입니까."

끝내 할 말을 찾지 못한 저는 그 어머니의 앙상한 손을 잡아 드리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오늘도 울고 있는 군 의문사 유족을 기억해 주십시오

 아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군 입대 전날 친구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비좁은 방에서 자고 훈련소까지 동행할 정도로 사교성이 좋았던 그 아들이, 어려서부터 장사하는 엄마를 밤늦게까지 기다리며 웃음을 줬던 그 아들이 자살했다는 전화였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군 입대 전날 친구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비좁은 방에서 자고 훈련소까지 동행할 정도로 사교성이 좋았던 그 아들이, 어려서부터 장사하는 엄마를 밤늦게까지 기다리며 웃음을 줬던 그 아들이 자살했다는 전화였습니다. ⓒ

이렇게 군에서 자식을 잃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분이 매년 수백 명씩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난 1998년 이후 지금까지 매년 평균 150여명의 군인이 각종 사건 사고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이승원 일병처럼 그나마 명예회복이 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사례는 극히 일부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부대에서 사망한 군인들은 구타나 가혹행위가 없었던 '참 좋은 부대'에 있었던 걸까요. 이승원 일병이 근무했던 그 부대에서만 이처럼 참혹한 구타와 가혹행위가 있었고 다른 여타의 부대는 일체 이런 일이 없었을까요. 전 절대 그렇지 않다고 자신있게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승원 일병과 전혀 다르지 않은, 군 복무중 사망한 이들은 여전히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방부는 이승원 일병처럼 피해 사례를 입증하면 '공무상 연계성'을 확인하여 순직 처리해 줄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틀린 주장입니다. 군 부대에서 벌어진 그 은밀한 폭력 행위를 그 부모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그 피해를 소명해야 '억울한 죽음'으로 인정해 주고 순직 처리 여부를 결정해 주겠다니요…. 현재의 시스템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승원 일병의 어머니처럼 "못난 부모 때문에 네가 죽었다"며 스스로를 자책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군 의문사 유족은, 그래서 오늘도 전국에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어버이날인 오늘, 이승원 일병의 어머니는 가슴에 꽃을 달아줄 자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오늘 전화를 했습니다. "식사는 잘 하고 계시냐"고 여쭈니 어제 아들이 있는 대전 국립묘지에 다녀왔다며 힘없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사고가 일어나기 10일 전, 마지막 면회 때 아들이 맛있게 먹던 프라이드 치킨이 생각나서 맥주와 함께 사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맛있게 먹어치우던 그 아들 대신 '줄어들지 않는 치킨'을 앞에 두고 울다 왔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엔 이런 아픔을 가진 분들이 무척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일이 소식을 다 전할 수 없는 이 모든 분들에게 대신 전합니다.

'부디 힘내세요. 어머니, 아버지는 죄인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옥처럼 빛나는 아들을 지켜드리지 못한 이  나라과 국방부가 죄인입니다.'

이 상식이 확인되어 의무 복무를 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가 숨진 모든 군인은 그 사망의 원인을 구분하지 않고 당연히 국가유공자로 예우받는 그날까지 함께 싸워 드리겠습니다. 그날까지 부디 좌절하지 말고, 죽지 말고 우리 끝까지 함께 싸울 것을 약속해요. 어머니, 아버님. 사랑합니다. 힘내세요.


#군 의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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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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