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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타공연을 하는 사람들에겐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필자가 기억하는 가장 멋진 난타는 형수 두 분이 마주 앉아서 두드리던 다듬이질 소리다.
난타공연을 하는 사람들에겐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필자가 기억하는 가장 멋진 난타는 형수 두 분이 마주 앉아서 두드리던 다듬이질 소리다. ⓒ 임윤수

필자는 아직도 형수들을 부를 때 '아주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고 '헝'이라고 부르고 있다. 4명의 누이 아래서 자라다보니 누이들이 올케언니를 부르던 호칭인 '헝(형)'에 익숙해지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한 때, '불알 떨어진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잘 고쳐지지 않아 지금껏 그렇게 부르고 있다. 형과 형수가 함께 있으면 형에게는 '형', 형수에게는 '헝'이라고 부르니 구분도 된다.

형수 두 분, 누이 넷, 나이가 더 많은 여자 조카 등 여자들이 우글거리는 환경 속에서 자라다 보니 여자들만이 가질 법한 추억도 몇몇 있다. 대표적인 추억이 다듬이질 사건(?)이다.

가장 멋진 난타로 기억하는 '다듬이질 소리'

난타공연을 하는 사람들에겐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필자가 기억하는 가장 멋진 난타는 형수 두 분이 마주 앉아서 두드리던 다듬이질 소리다. 지금 생각해봐도 기가 막힐 정도로 멋진 장단이며 조화다. 강하고 약하게, 빠르고 느리게, 박자를 주고받듯이 두드리는 다듬이질 소리는 경쾌하기도 하지만 꾸깃꾸깃했던 광목천들이 다림질을 한 것처럼 판판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형수들이 하는 다듬이질이 너무 재미있어 보여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이용해 빨랫줄에 걸린 이불보를 걷어다 다듬잇돌 위에 놓고 다듬이방망이로 흠씩 두드려봤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형수들이 내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손바닥이 찌릿하게 아팠지만 그래도 열심히 두드려봤다. 그래도 잘 안 된다. 결국 빨래를 대충 구겨서 빨랫줄에 다시 널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저녁에 빨래를 정리하던 형수가 이불껍데기가 헤진 것을 발견하면서 누군가가 장난을 했다는 게 들통이 났다. 강약을 조절해가며 골고루 두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한곳만을 집중해서 두드리는 바람에 이불껍데기가 헤지는 일이 벌어진 거다. 

죄 없는 누나들이 범인(?)으로 지목돼 한동안 눈치를 받아야했지만 필자는 비겁하게 지금껏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 침묵 속 기억을 이정란 지음, 에르디아 출판의 <오래된 물건과 속닥속닥>이 다시금 일깨운다.

침묵하던 기억을 일깨워 준 <오래된 물건과 속닥속닥>

 <오래된 물건과 속닥속닥> 표지
<오래된 물건과 속닥속닥> 표지 ⓒ 에르디아
<오래된 물건과 속닥속닥>은 저자가 오래된 물건을 소유하면서 발생하는 이런저런 에피소드와 추억 등을 소소하게 펼쳐놓는다.

물려받고, 분리수거하는 곳에서 주워오고, 얻어오고, 돈을 주고 사오고, 친정식구들 몰래 챙겨오기까지 하는 저자의 마음, 오래된 물건에 대한 저자의 애착은 짝사랑 같은 막무가내다.

친정식구들 몰래 백자기를 챙기는 저자의 모습은 친정에만 오면 뭔가를 챙겨가기만 하는 딸들을 일컫는 '평생 도둑'이라는 말이 연상돼 피식 웃게 한다. 

안 봐도 비디오라고 오래된 물건을 발견했을 때 빛날 저자의 눈빛, 골동품을 어루만지는 저자의 손질이 눈에 선하다. 저자가 오래된 물건과 속닥이는 건 눈에 보이는 고풍스러움 때문만은 아니다.

오래된 물건에 스며있는 추억, 오래된 물건들이 품고 있는 실용성이나 역사가 넉넉하기에 그토록 애지중지하리란 생각이다.   

저자와 속닥이고 있는 물건은 반닫이, 함, 뒤주, 사방탁자, 병풍, 괘종시계, 백자기, 화로, 다듬이, 한지, 고무신, 모시 적삼, 손수건, 목화솜 이불, 버선, 참빗, 소반, 바가지, 시루, 약탕기, 옹기, 바구니, 수세미, 번철, 옻칠목기, 보자기 등이다.

'세모시-올이 가늘고 고운모시- 비밀은 여인네 입술에 있다'는 말처럼, 모시는 일일이 입으로 벗기고 손으로 하나하나 매만져 실을 만들기 때문에 올이 곱고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모시째기 과정이 끝나면 섬유의 굵기를 일정하게 하는 '모시삼기'과정을 거치는데, 그 정도에 따라 모시의 품질이 정해진다. - <오래된 물건과 속닥속닥> 88쪽

웬만한 집이면 거반 있었을 물건들이니 저자가 떠올리는 추억은 결코 낯설지가 않다. 깜빡 잊고 있었던 시절을 누구나가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물건들이다.

 오래된 물건은 깜빡 잊고 있었던 시절을 누구나가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물건들이다.
오래된 물건은 깜빡 잊고 있었던 시절을 누구나가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물건들이다. ⓒ 임윤수

다듬이질 소리를 기억하게 하고, 화롯불에 구워 먹던 군고구마 맛을 떠올리게 하고, 모시저고리 사이로 살짝살짝 비치던 할머니의 품을 그립게 한다. 뿐만이 아니다. 참빗으로 빗어 내리던 단발머리 시절, 째깍거리며 돌아가던 괘종시계와 관련한 추억 등이 행사장에 내걸린 주마등만큼이나 주렁주렁하다.   

필자의 고향에서는 빨래를 할 때 두드리는 방망이를 '빨랫방망이'라고 했는데 책에서는 '옷에 비누를 칠하고 다듬이로 두드리면 땟국물이 줄줄 흘렀고'라고 하고 있다. 빨랫방망이를 저자의 동네에서는 다듬이라고 했던 건지 아니면 정말 다듬이질을 할 때 쓰는 방망이를 빨래를 할 때도 병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용도로 사용하는 물건에 대한 호칭이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타임머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비싸고 화려해야만 명품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면 그게 곧 보물이 되기도 하고 명품이 될 수 있음을 <오래된 물건과 속닥속닥> 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저자 이정란의 삶에서 알 수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오래된 물건과 속닥속닥>┃지은이 이정란┃펴낸곳 에르디아┃2013.3.25┃값 1만 3000원



오래된 물건과 속닥속닥 - 골동품이 내게로 와 명품이 되었다

이정란 지음, 김연수 사진, 에르디아(2013)


#오래된 물건과 속닥속닥#이정란#에르디아#다듬이질#골동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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