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최열 환경재단 대표를 사석에서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봄날,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근처의 멕시칸 레스토랑에서였다. 당시 나는 대학생이던 시절부터 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환경운동연합의 회원으로 가입을 했고, 1996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자원봉사자로 환경운동연합 사무실을 찾았다.

요즘에야 초중고 학교에서부터 일정 시간의 자원봉사를 필수로 하게 하고 있으며, 대학생들도 이런저런 자원봉사를 해서 소위 스펙을 쌓는 데 도움이 되는 실정이지만, 당시는 자원봉사자도 흔치 않았고 제 발로 걸어서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찾는 이가 많지 않았다. 다행히 당시 환경연합에 국제연대팀 활동가로 일하던 이가 나를 보더니 이런저런 번역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해줘서 환경 분야의 번역이나 통역 일을 종종 해주면서 인연을 쌓아나갔다.

영어 실력도 턱없이 부족한 처지라 전문 영역의 번역이 무척 어려웠지만, 오히려 번역을 해주는 것이 내게 공부도 되었던 시기였다. 그렇게 나처럼 자원봉사를 하는 이들이 서넛이 있었는데, 어느 날 국제연대팀 간사가 연락이 와서, 총장님이 식사를 초대하고 싶어하시니 대학로로 나오라고 해서 그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큰 환경단체의 사무총장이 초대하는 자리여서 무척 어려운 자리일 거라고 생각하며 나갔다. 당시 20대 중반이고 사회 경험도 일천한 어린 나이였으니 말이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멕시코 음식도 낯설었다. 그런 자리였는데 최열 당시 환경연합 사무총장은 자원봉자자들이 환경운동을 같이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시면서 당신이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 세상 바깥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셨다. 나는 그저 저런 위치의 사람이 나 같은 '애송이'들을 만나준다는 사실이 참신했다.

1990년대는 한국에서도 시민사회가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시기였다. 일반 시민들도 NGO(비정부 단체) 혹은 NPO(비영리 단체)가 뭔지 차츰 알게 되는 시기였다. 나는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와서 대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학과 공부나 하고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래도 사회에 뭔가 보람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서 관심을 가진 것이 환경단체의 회원이 되고 환경운동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지구의 위기에 대한 얘기가 솔솔 나오던 시기였고, 환경 문제는 정치적이지도 종교적이지도 않으며, 어느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그리고 미래세대를 위한 인류 공통의 문제이기에, 환경운동은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당시 환경운동가들 중에는 학생운동을 하거나 민주화운동을 하던 경력을 가진 이들이 시민운동으로 자리를 옮겨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나같이 '사회의식'이라곤 일천한 사람에게는 그들을 대하기가 참 어려웠다. 그런 나에게 최열 대표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편안한 인상으로 회원을 스스럼 없이 만나는 분이셨고, 전지구적 환경운동을 해야 한다고 설파하신 분이었다.

그의 격려 덕분에,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환경연합의 자원봉사자의 자리를 지켰고 해외의 환경회의에 통역을 나가기도 하고, 국내에 방문하는 환경운동가들의 발표를 통역하고 번역하는 보람 있는 일들을 하게 되었다. 나의 영어 실력이 덩달아 늘어난 것도 좋았지만, 세계의 환경운동가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서 받았던 영감이나 용기, 우정은 더없이 귀한 자산이 되었다. 이런 경험들 덕분에 나는 지금은 환경연합의 국제협력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나 자신도 환경모임을 꾸리고 있다.

최열 대표는 당시 사무총장 임기를 끝내고 대표를 거친 다음에, 환경재단을 설립하고 현재까지 재단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소위 이제는 환경운동의 아이콘이며 대부가 된 셈이다. 최열 대표가 30여 년 환경운동에 매진한 덕에 그가 벌이는 환경 프로젝트에는 모금도 잘 되고 호응도 좋은 편이다.

2012년부터는 환경재단에서 아시아 지역 여러 나라에 태양광 전등지원사업을 시작했으며 최근 1월에는 아웅산 수치 여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만나서, 미얀마에 태양광 전등을 지원하기 위한 약속도 했다. 이런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 이제 환경운동하는 후배들도 많이 육성이 되었으니 편히 쉬엄쉬엄 다니실 만도 할 텐데 최열 대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현장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2011년도에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낙동강 함안보 현장에서 도로변에서 강물을 바라보며 '4대강 사업 반대'를 외치던 최열 대표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연하다. 환경연합 전국회원대회가 있던 날이었는데, 폭우가 쏟아지는 낙동강변 도로에 차만 씽씽 달리지, 누가 와서 보겠는가….

그런데 그는 빗속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4대강 사업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 작은 체구에서 한껏 목소리를 높였으나 거센 비소리에 가로막혀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나도 비에 맞아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최열 대표는 60세가 넘으셨는데 저렇게 힘들게 현장에서 고생하시나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촛불 시위가 거세지자, 시민사회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과 조사를 했다. 2008년 9월에는 검찰이 환경연합에 압수수색을 감행했다. 수사과정에서 최열 대표가 공금을 횡령했다고 언론에 떠들어댔다. 환경연합과 관련하여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그들은 환경재단과 관련해서 조사하기 시작하여 공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걸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항소심에서 별도의 증거나 심리가 없이 유죄가 되고, 지난 15일에 대법원에서 확정이 되었다. 또한 그가 전세집을 매입하면서 했던 개인 간의 거래를 두고, 부족한 대금을 빌렸다가 갚은 것에 대해 알선수재의 죄목으로 1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 최대의 국책 사업이자 '비리 투성이'인 4대강 사업에 대해 줄기차게 반대해 온 환경단체들에 대한 겁박에 다름없다고 나는 믿는다. 최열 대표에 대한 수사를 지휘한 김광준 검사야말로 최근 10억 원대 수뢰 혐의로 구속 기소돼 해임된 이른 '떡검'이다. 그는 '최열을 재기불능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고 한다.

최열 대표는 19일 수감될 예정이다. 이 정권은 환경운동가들과 환경을 지키려는 시민들에게 단단히 본보기를 보여주려고 환경운동의 대부를 잡아간다. 나서면 다칠 수 있으니 다들 몸조심 하라는 경고일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몸을 낮추고 외면한다면, 우리가 어찌 민주사회의 시민이겠는가. 우리는 들불처럼 더 크게 번지고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최열 대표가 뚜벅뚜벅 가는 길을 따라서 걸을 것이다.


#최열#환경재단#환경운동연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