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제주 구엄리 소금밭
제주 구엄리 소금밭 ⓒ 이기원

제주 연수 가던 날 오전 시간이 남아 렌터카를 빌려 이곳저곳 다니다가 구엄리 소금밭(염전)을 보았다. 소금밭도 밭이니 땅 위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로 개념도 없는 상태에서 난생 처음 본 소금밭이었다. 생각과 달리 구엄리 소금밭은 바위 위에 만들어졌고 규모도 작았다.

연수가 시작되어 답사를 하면서 제주역사교사모임 선생님들이 들려준 제주도 사람들의 삶 이야기 중에 소금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제주도에는 소금이 귀해서 김치를 담그려면 배추를 바닷물에 담가 절였다"는 이야기였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제주도에서 소금이 귀했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워 함께 간 우 선생님에게 물어보았더니 바로 대답해주었다.

"제주도 해안에 솟아오르는 용천수 때문에 바닷물의 염도가 낮아서 소금 만들기가 어려워서 그렇대요."

이완용이 인천 주안리를 시찰한 이유... 청과 일본의 '소금 전쟁'

"명일에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탁지대신 고영희 사대신이 인천 주안리에 나가서 소금 굽는 마당을 시찰한다더라."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책표지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책표지 ⓒ 푸른역사
<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22일자 기사이다. 당시 인천 주안리는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는데 이완용을 비롯한 4대신이 시찰한 이유가 무엇일까. 당시 주안리에는 '소금 굽는 마당'이 새로 생겼는데 전통적인 소금 생산 방식이었던 자염방식(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생산하는 방식)과는 다른 천일염(바람과 햇볕에 말려서 생산한 소금)을 굽는 마당이 새로 생긴 것이었다.

자염 대신 천일염을 굽는 소금 마당이 최초로 인천 주안리에 생겼다고 해서 이완용을 비롯한 4대신이 굳이 가야할 이유는 뭘까. 당시 이 사업이 아주 중요한 국책사업이었음을 알려준다. 1907년은 을사조약 이후 헤이그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의 장제퇴위가 이루어지고 군대가 해산되었던 해였다. 결국 이 시기 국책사업이란 일본이 역점을 두어 추진했던 사업을 의미한다. 이완용, 송병준을 비롯한 친일 대신들은 이런 사업을 외면할 수 없었을 터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이 되면서 청과 일본은 조선 시장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소금 시장도 그 중 하나였다. 조선에서는 전통 방식으로 생산된 자염으로 젓갈, 김치, 장 등을 만들어 생활했다. 하지만 자염은 가격이 비쌌다. 비가 많이 올 때는 소금 생산이 급감하여 소금 기근 현상까지 발생하는 등 기후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개항 직후에는 일본산 소금이 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일본산 소금은 조선 사람들에게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조선에서 생산된 자염보다 희고 값도 쌌지만 조선산 소금에 비해 염도가 떨어져 일본산 소금으로 담근 김치나 장이 여름이 되면 맛이 변하거나 부패하는 일까지 발생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의 소금 시장 주도권은 청이 장악하게 됐다.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생산하던 조선이나 일본과는 달리 청은 바람과 햇볕으로 말려 소금을 생산했다. 대량 연료를 필요로 했던 조선, 일본의 소금 생산 방식과는 달리 연료가 필요 없는 청의 소금 생산이 가격 경쟁력에서 유리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을사조약 이후 사실상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은 조선에 천일염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천일염전의 축조는 형식상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이 동원되어 이루어진 국책사업이었다. 하지만 천일제염의 모든 일은 일본인 관리들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졌다. 이완용을 비롯한 4대신들이 주안에 가서 시찰한 것은 일종의 퍼포먼스에 불과했다. 

육지보다 앞선 '천일염 생산지' 제주도

제주도 지방에는 호표(호랑이와 표범)나 시랑(승냥이와 이리)이 없어 사슴과 노루가 번성하고 있습니다. 또 큰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섬이지만 소금을 굽기가 어려워 토착민들이 소금을 귀하게 여기니 지금에 각 포에서 겨울에 입번하는 수군 1~2명을 뽑아 소금 1석이나 10두를 받아들여 관에서 제주로 보내어 장록비(노루, 사슴의 가죽)와 바꾸게 하면 앙쪽이 모두 편리할 것입니다.

한때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사림 유희춘이 선조에게 건의한 내용이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거칠고 구멍이 뚫린 현무암으로 둘러싸인 제주도에서는 소금밭을 만들기 어려웠다. 어렵게 소금밭을 만들어도 바닷물이 싱거워 들인 공에 비해 소금 생산은 형편없이 적었다.   

그렇다고 육지로부터 소금 운반 또한 쉽지가 않아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모래 소금밭'과 '돌 소금밭' 두 종류의 소금밭에서 소금을 생산하게 되었다. '모래 소금밭'은 종달리 소금밭이 대표적인데 육지의 영향을 받은 자염방식의 염전이다. '돌 소금밭'을 대표하는 곳이 구엄리 소금밭인데 육지와는 달리 햇볕과 바람을 이용한 천일염을 생산한다. 개항 이후 인천에 처음으로 천일염전이 만들어졌던 것에 비해서 제주에서는 그 이전부터 천일염전이 존재했던 것이다.

우리 전통 음식의 기본이 되는 김장, 간장, 된장, 고추장 그 어떤 것을 만드는 데도 빠질 수 없는 소금이다. 밥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소금 없이는 누구도 살 수 없다. 그래서 소금을 둘러싸고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소금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수많은 일들이 씨줄이 되고 날줄이 되어 역사가 된다.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은 소금을 주제로 역사를 풀어준다. 책을 읽다보면 알맞게 절여진 김치 맛이 느껴진다.

덧붙이는 글 |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유승훈 씀, 푸른역사 펴냄, 2012.7. 20,000원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 짜게 본 역사, 간을 친 문화

유승훈 지음, 푸른역사(2012)


#소금 한국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