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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 예수> 표지
<바보 예수> 표지 ⓒ 삼인
예수 없는 한국 교회가 많다고들 합니다. 예수가 살아냈던 십자가 삶은 뒷전이고 오로지 영광과 승리에만 취해 있다는 뜻이겠죠. 흙과 같이 바스러지는 삶은 뒷전이고 돌처럼 굳어 있는 교리들만 잔뜩 늘어놓는다는 것이겠죠.

통일을 내다보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여전히 냉전주의라는 틀에 갇혀 있는 엉뚱한 근본주의 신앙인들이 남한 내 기독교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고 하죠. 공산당 척결, 북한 괴뢰 정권, 초전박살, 그런 말들이 교회 강단에까지 울러 퍼진다고 합니다.

과연 그런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요? 예수께서 보여준 그 십자가 정신을 뒤따라야 한다면서도 북한의 굶주림과 파멸만을 읊조리고 있으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이지 않을까요? 예수께서 보여준 '자기 비움'을 뒤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되레 성공신화만 부채질하고 아무래도 '뒤틀린 기독교' 같지 않나요?

한완상님은 <바보 예수>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게 어떤 삶인지 아주 잘 밝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이었던 그가 말한 '바보'란 '바로 보고 바로 보살펴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것이 예수가 드러낸 '자기 비움'이자 곧 '실존적인 결단'이라고 하죠.

사랑이 자기 비움일 터인데, 가장 모범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요, 그 하나님은 역사적 예수의 삶에서 구체화된 것입니다. 즉, 성육신은 자기 비움을 신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의 신 또는 대제사장의 하나님은 성육신을 거부합니다. 절대적인 외재신으로 인간 위에서 계속 군림하면서도 인간을 통치하고 심판하지요. 그러기에 그들 신도 성육신되어야 하고 육화되어야 합니다.(194쪽)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교회가 땅 속에 있을 때에는 그야말로 예수를 '내재신'으로 모셨죠. 어떤 허황된 꿈도 꾸지 않고 오로지 예수를 뒤따라 자기 목숨까지도 내놓은 것 말이죠. 하지만 교회가 국교라는 자리를 차지할 무렵부터 예수는 '외재신'으로 떠밀려 버렸죠. 오늘날 화석화된 교리, 군림하는 예수상, 정치화된 교회상도 모두 그런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가 바라보는 '내재신' 곧 '자기 비움'은 과연 뭘 뜻하는 걸까요? 예수께서 보여준 '혁명적 발상'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오른 뺨을 치면 왼 뺨을 돌려대는 것,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주는 것 말이죠. 진정한 동행을 뜻하는 말이겠죠.

물론 그것은 승리주의에 취한 삶으로는 힘들다고 하죠. 오히려 '우아한 패배'를 자기 삶으로 살아낼 때에만 가능하다고 하죠. 주릴 때에 먹을 것을 내주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선뜻 주고, 헐벗었을 때에 자기 입을 것까지 기꺼이 퍼주는 사람들 말이죠. 정치적인 흐름에서 보자면 '햇볕정책'이 그에 알맞는 삶이겠죠.

그런데도 냉전 가치와 기독교 근본주의 신앙에 갇혀 있는 자들은 그런 바보가 되는 걸 못 마땅해 한다고 하죠. 그들은 도무지 원수를 사랑할 수도 없고, 또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고 하죠. 남한 사회에 장로 대통령이 세 명이나 나왔어도 되레 남북관계가 더 악화된 것도 그런 모습 때문이었다고 하죠.

'자기 비움'의 결단... 평화가 흐르는 노래를 부르자

이 책은 네 개의 얼개로 짜여 있습니다. 제1부 '바보의 힘', 제2부 '보시니 참 아팠더라', 제3부 '역설의 행복' 그리고 제4부 '참바보가 되는 교회'가 그것이죠. 겉으로는 그런 틀을 따르고 있지만, 안으로는 앞서 이야기한 '자기 비움'과 함께 '실존적인 결단'이라는 두 가지 알맹이를 갖추고 있는 게 이 책이죠.

'실존적인 결단'을 이야기할 때 한완상님이 자주 떠올리는 인물이 있죠. 슈바이처 박사가 그죠. 사실 그는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신학자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는 오히려 이상한 이방인처럼 여겨질 뿐, 예수가 보여준 산상수훈의 사랑 실천에 훨씬 더 큰 의미를 찾았다고 하죠. 그때 비로소 슈바이처 박사는 의료선교로 그 삶을 바꿨다고 하죠.

물론 그의 선교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확장탐욕과는 다른 차원이라고 하죠. 더욱이 그것은 머잖아 통일이 되어 북한 땅에 예배당을 세우는 것과 같은 남한 교회의 선교전략과도 다른 흐름이라고 하죠. 예수께서 원했던 것도 건물이자 제도가 아니라 '인간 실존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까닭이라는 뜻이겠죠.

그것이 곧 공적인 영성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하죠. 이른바 이상재 선생과 조만식 선생과 안창호 선생과 김구 선생과 같이, 조국의 독립과 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처럼 말이죠. 그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성찰입니까?

오늘 한국 교인들도 교회의 시설, 장비, 건축, 살림도구, 내부장치, 재산 등은 주목하고 자랑하지만, 교회 자체가 예수의 몸이요 예수의 마음이요 영임을 보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인들 중에 아직도 사마리아 여인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게다가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고 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삶의 편익만을 생각했습니다.(247쪽)

아주 예리한 가르침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수준이 마치 성경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모습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을 찾는 것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도, 실은 무슨 부적이나 미신을 좇는 것처럼, 자기 편익에만 매달려 있는 까닭이죠. 물론 그것은 교회 부흥에 목말라 하는 나로서도 다르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어찌 진정한 '예수따르미'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그래서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렇게 기도하는 걸까요? 북녘 땅에서 굶주리고 있는 자들이 그 틀에서 벗어나도록 한국 크리스천들이 앞서야 한다고 말이죠. 남과 북이 증오나 냉전에 관한 노래를 부를 게 아니라 평화가 흐르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말이죠. 냉전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바리세파 사람들보다는 자기 비움의 실존적인 결단을 이루는 신앙인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이죠.

남한 땅에 진정한 '바보' 신앙인들이 들풀처럼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냉전사고와 엉뚱한 근본주의 신앙관에 잠든 채 예수의 가치를 바로보지 못한 이들이 이 책을 통해 바르게 깨어났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먹을 것이 없고 입을 옷이 없는 북녘 땅 백성들을 바로 보살펴 주는 남한 내 예수따르미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먼저 나부터 말이죠.

덧붙이는 글 | <바보 예수> 한완상 씀, 삼인 펴냄, 2012년 9월, 318쪽, 1만3800원



바보 예수

한완상 지음, 삼인(2012)


#한완상 님은 〈바보 예수〉#예수따르미#자기 비움#실존적인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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