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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흥왕릉 앞의 웅혼한 소나무가 경이롭다.
법흥왕릉 앞의 웅혼한 소나무가 경이롭다. ⓒ 정만진
금척리 고분군을 지나 경주 쪽으로 조금 나아가다가 삼거리에서 경주대학교 방향으로 좌회전을 한다. 금세 신호등이 나온다. 그 앞에서 오른쪽 농로로 내려간다. 농로 좌측은 서악 뒷자락, 오른쪽은 논이다.

들판 중간쯤에 법흥왕릉 가는 길(사적 176호) 이정표가 서 있다. 이정표를 따라 왼쪽으로 얕은 산을 향해 들어간다. 경주시 효현동 산 63번지.

논이 끝나는 곳에는 주차장도 마련되어 있지만,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는 길은 산속으로 계속 이어진다. 산은 자연의 것인데도 사람들은 그걸 잊은 모양이다. 당연히, 길이 있다고 차를 산 속으로 몰고 들어갈 수는 없다. 그것도 법(法)을 흥(興)하게 한 왕을 찾아가는 길에 그런 무례를 저질러서야!

법흥왕릉에 닿으면 묘소 정면을 지키고 있는 웅혼한 소나무들이, 잔뜩 기대를 품고 이곳까지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황홀에 젖게 한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최상의 이상형과 마주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나 할까. 격조 높은 기품과 웅장한 위용까지 두루 갖춘 소나무들 앞에서 나그네는 문득, 법흥왕이 이차돈의 목을 쳤다는 사실마저 깜빡 잊는다. 까닭도 없이, 법흥왕을 인자하고 너그러운 할아버지로 상상해버리는 것이다.

 법흥왕릉 앞의 소나무들. 법흥왕릉을 찾은 답사자는 왕릉보다도 이 소나무들의 향기에 취한다.
법흥왕릉 앞의 소나무들. 법흥왕릉을 찾은 답사자는 왕릉보다도 이 소나무들의 향기에 취한다. ⓒ 정만진

법흥왕, 성품 관대하고 사람 사귀기 좋아해

그런데 역사서를 읽어보니, 그런 판단이 아주 잘못인 것도 아니다. 삼국사기는 법흥왕이 514년에 즉위하여 540년까지 26년 동안 신라를 다스렸는데 '키가 7척이고, 성품이 관대하여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재위 16년(529)에는 '살생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고도 적혀 있다. 물론 법흥왕이 살생 금지 명령을 내린 것은 본인이 528년에 불교를 처음으로 공인했기 때문일 터이다.

 법흥왕릉
법흥왕릉 ⓒ 정만진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눌지왕(417∼458) 때다. 처음에는 묵호자가 일선군(경북 선산) 모례(毛禮)의 집에 왔다가 이윽고 궁궐에 들어가 왕녀의 병을 낫게 해주었고, 그 다음에는 아도가 역시 모례의 집에 머물면서 몇 해 동안 불교를 전파했다. 법흥왕은 불교를 일으키고 싶었지만 신하들이 반대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527년(법흥왕 14), 이차돈이 나섰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차돈은 '신하와 백성이 나라와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절개이자 의리'라면서,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선언한다. 이윽고 법흥왕과 입을 맞춘 이차돈은 '왕의 허락을 받아 절을 짓기로 했다'고 떠들면서 천경림(天鏡林)의 나무를 베었다. 천경림은 신라인들이 대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신령한 장소였다. 신하들이 강력히 법흥왕에게 항의했다.

법흥왕의 주요 업적
법흥왕은 재위 4년(517) 처음으로 병부(兵部, 국방부)를 설치했다.

재위 7년(520)에는 법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관리들의 관복을 제정하였는데, 붉은빛과 자줏빛으로 등급을 표시하였다.

18년(531)에는 처음으로 상대등(국무총리)이라는 벼슬을 두었다. 법흥왕이 상대등을 두었다는 것은 그 동안 화백회의를 통해 6부 촌장들이 만장일치로 국정을 운영해오던 데 비해 왕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제 화백회의 식의 귀족회의는 상대등에게 맡기고, 왕은 독자적으로 최후 결정만 하면 되는 지위로 올라섰던 것이다.

19년(532)에는 금관가야왕 구해가 왕비 및 세 아들 노종, 무덕, 무력과 함께 보물들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 544년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는 등 신라에 많은 공을 세운 셋째아들 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왕은 재위 23년(536), 최초로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왕릉 앞의 안내판은 병부 설치, 법령 반포, 관복 제정, 상대등 설치, 불교 공인, 연호 사용 등 법흥왕의 업적을 두고 '신라의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고 평가한다. 법흥왕이 상대등을 두었다는 것은 그 동안 화백회의를 통해 6부 촌장들이 만장일치로 국정을 운영해오던 데 비해 왕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제 화백회의 식의 귀족회의는 상대등에게 맡기고, 왕은 독자적으로 최후 결정만 하면 되는 지위로 올라섰던 것이다.
이차돈이 잡혀왔다. 왕과 신하들 앞에서 이차돈은 왕명을 받은 적이 없다고 자백했다. 이차돈은 죽음 직전에 '나는 불법을 위해 죽는 것이니 반드시 부처님께서 신이한 일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목을 베자 그의 머리는 소금강산 백률사 자리로 날아갔고, 목에서는 젖같이 하얀 피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 이후 불교를 헐뜯는 신하가 없어졌고,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였다.

법흥왕은 이차돈이 죽은 천경림에 신라 최초의 공인 사찰인 흥륜사를 창건하기 시작했다. 터를 닦고(527년) 나무를 크게 베었는데(535년) 절은 544년(진흥왕 5)에 완성되었다.

업적 대단한 법흥왕, 그러나 묘소는 조촐

법흥왕의 묘소는 그저 조촐하다. 한때 호석들이 있었던 흔적도 보일 듯 말 듯 남아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간소할 뿐이다. 안내판도 '크기는 다소 작은 편'이라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왕은 지방 관원들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일을 허가했다.' 재위 25년(538)의 일이다. 그가 '너그럽고 후하며 사람들을 사랑했다'는 표현이 사실임을 알겠다. 무덤을 크게 만들려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을 시켜야 한다. 그래서 법흥왕은 이렇게 유언을 했을는지 모른다. '나의 무덤을 쓸데없이 크게 만들지 말라.'  

 법흥왕릉으로 들어가는 주차장에서 바라본 왕릉 진입로 풍경. 소나무숲이 대단하다는 느낌부터 드는 곳, 바로 법흥왕릉이다.
법흥왕릉으로 들어가는 주차장에서 바라본 왕릉 진입로 풍경. 소나무숲이 대단하다는 느낌부터 드는 곳, 바로 법흥왕릉이다. ⓒ 정만진

애공사 터에 남은 신라 보물 '효현동 3층석탑'

법흥왕릉에서 나와 오른쪽에 대천, 왼쪽에 선도산을 두고 다시 4번도로로 향한다. 500m가량 나온 다음 '외외 2길'이라는 왼쪽 마을길로 들어서면 '경주 효현동 삼층 석탑'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법흥왕이 죽었을 때 '애공사(哀公寺)의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는데, 탑이 있는 이곳 효현리 420번지 일대가 애공사 터가 아니었나 여겨진다.

하지만 이 탑은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9세기라면 법흥왕의 시대인 6세기보다 한참 뒤의 일이다. 절 이름을 놓고 따져 보더라도 법흥왕 사후 그[公]를 기려[哀] 사찰을 건립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추론일 법하다.

그나저나 이 탑은 보물 67호인데도 찾는 이가 거의 없다. 국보가 워낙 많은 곳이 경주인 탓이다. 하지만 닭의 머리가 아니라 소의 꼬리가 된 것을 굳이 한탄할 일도 아니리라. 법흥왕릉을 답사하는 이도 별로 없는데 어찌 법당도 없고 탑만 하나 달랑 남은 곳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인가. 다만 스스로를 진지한 '역사 여행자'라 자부한다면, 법흥왕릉과 애공사 탑도 잊지 말고 꼭 찾아보아야 하리라.

 효현동 석탑. 국가 지정 보물이지만 도시 자체가 온통 박물관급인 경주인 탓에 일반 관광객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효현동 석탑. 국가 지정 보물이지만 도시 자체가 온통 박물관급인 경주인 탓에 일반 관광객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 정만진



#법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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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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