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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문명 기행에서 최고는 뭐니뭐니해도 룩소르다. 룩소르는 현재 이름이고, 그리스인들이 붙여준 옛 이름은 테베다. 자신들의 고향 그리스 중부의 테베가 생각난 모양이다. 미국의 개척자들이 도시의 이름으로 유럽 도시명을 붙인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가 잠든 사이 크루즈는 소리 없이 북쪽으로 흘러갔다. 아침이 돼 일어나보니 어느새 룩소르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 동안 유적지를 다 둘러볼 수 있을까. 수박 겉핥기라고 생각해도 너무 심하다. 신전 하나를 들어가도 제대로 이곳저곳 보려면 하루도 부족한 데 말이다. 그런데 어쩔 수 있겠는가. 일행이 있고, 또 가야 할 행선지가 있으니 말이다. 이게 바로 패키지여행의 한계다.

룩소르, 아니 과거의 테베는 고왕국 때부터 번성한 곳이었다. 중왕국 때인 기원전 2000년경 아메넴헤트 1세 재위 당시 이곳은 수도로 정해졌고, 주요한 건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테베의 영광은 신왕국 때부터다. 침략자 힉소스를 물리친 파라오들은 그 공을 이곳의 최고신인 아몬에게 돌리고 신전을 세웠다. 그렇게 이곳은 이집트의 심장이 됐다. 그 후 5세기 동안 파라오들은 이 도시를 끊임없이 단장해 이집트 고대 왕국 최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룩소르는 크게 나일강 동안과 서안 두 부분에 유적지가 펼쳐져 있다. 동안에는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이 있고, 서안에는 그 유명한 왕들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이 있다. 파라오와 왕비들이 묻힌 곳이다. 서안에는 그 밖에도 여러 개의 장례신전이 즐비하다. 람세스 2세의 신전인 라메세움, 람세스 3세의 도시 신전인 메디네트 하부, 하트셉수트의 장례신전 등등. 이 많은 유적지를 다 보지 못하고 언제 또 올지 모를 이집트를 떠난다는 게 아쉽고 또아쉬웠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곳에서 꼭 봐야 할 곳 몇 군데를 선정했다. 동안의 두 신전과 서안의 왕들의 계곡, 그리고 하트셉수트 장례신전이 꼽혔다. 저녁에 돌아오는 길에 멤논의 거상을 둘러봤다.

신전 중의 신전, 카르나크... 이집트 여행의 압권

카르나크 신전의 대신전 제1탑문으로 들어가는 스핑크스 길이다. 양쪽에 스핑크스가 도열해 있다.
 카르나크 신전의 대신전 제1탑문으로 들어가는 스핑크스 길이다. 양쪽에 스핑크스가 도열해 있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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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카르나크 신전에 들어섰다. 겨울의 햇빛이지만 강렬했다. 너무 눈이 부셔 선글라스를 끼지 않으면 다니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래서야 카메라에 사진을 담을 수가 있겠는가'라는 것. 그렇다. 오전에는 서안에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오전에 동안의 신전을 돌아보면 모두 역광이어서 사진을 찍기 어렵다. 아마도 여행사가 이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는데, 이를 어쩐다...

그럼에도 카르나크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무언가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나는 '왜 이집트를 문명기행의 종착지로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이곳을 보고 나면 세계의 어떤 문명도 시시하기 때문이다. 마치 유럽에서 로마를 맨 마지막에 가라는 것과 같다. 아무리 유명한 도시일지라도 고대 유적으로만 보면 로마를 따라갈 곳이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그러니 로마를 보고 나면 다른 것은 시시해져 버리는 게 아닌가. 여하튼 그만큼 카르나크는 이집트 여행의 압권이다. 신전 중의 신전이다.

카르나크는 100ha가 넘는 면적에 펼쳐져 있다. 고대 이집트 신전 중 가장 넓다고 한다. 최전성기의 카르나크가 관리하는 인구는 8만 명이었다고 한다. 65개의 마을과 상당수의 가축, 그리고 조선소를 소유하고 있었다. 신왕국 시절 파라오들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카르나크를 묘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떤 책을 읽어도 확연히 머리에 잘 정리가 안 된다. 그만큼 크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면을 통해 내가 느낀 감동을 당시 목격했던 장면과 몇 가지 자료에 힘을 빌어 정리해보자.

카르나크 신전의 대신전 내의 원기둥이 있는 방, 일명 다주실이다. 대형 원기둥에 온갖 상형문자와 채색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카르나크 신전의 대신전 내의 원기둥이 있는 방, 일명 다주실이다. 대형 원기둥에 온갖 상형문자와 채색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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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곳은 크게 세 신전으로 나뉜다. 남북의 축으로 본전이라고 할 수 있는 아몬 대신전이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고, 그 남쪽으로 조그만 몬투 신전 그리고 북쪽으로 무트 신전이 있다. 무트 신전 쪽에서 보면 멀리 룩소르 신전이 보이는데 옛날에는 이곳과 룩소르 신전이 연결돼 있었다고 한다. 길 양편에는 스핑크스가 도열했던 모양이다.

현재 이집트 당국은 이 길을 복원하고 있다. 몇 년 후 룩소르를 방문하면 카르나크와 룩소르 신전이 스핑크스길로 연결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카르나크에 가장 잘 보존된 곳은 아무래도 아몬 대신전이다(아래 설명은 아몬 대신전에 국한해 할 생각이다).

아몬 대신전의 제1탑문에 들어서기에 앞서 스핑크스들이 길 양편에 도열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이 파괴됐지만, 옛 위용을 능히 짐작할 수는 있다. 원래 124개의 스핑크스가 있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0개 정도다. 스핑크스길이 끊어지는 곳에 거대한 옹벽이 자리 잡고 있는데, 과거에는 아마도 이런 옹벽이 사방을 두르고 있었을 것이다. 한 변이 무려 2400m에 달했다고 한다. 이 옹벽에 제1탑문이 기다리고 있다. 엄청난 규모다. 길이 113m에 두께는 15m나 된다고 한다.

카르나크의 주요 도정은 이 제1탑문에서 시작해 제6탑문을 넘어 지성소까지 이어지는 일직선의 길이다. 이 길을 자세히 보면 약간 경사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성소 쪽에서는 저 멀리 제1탑문 밖까지 보이지만 탑문 쪽에서는 지성소를 볼 수 없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신전은 이집트 신전의 고전 형식 그대로다. 즉, 탑문을 통과하면 큰 안뜰, 원기둥이 있는 방, 봉헌실, 신성한 배가 있는 방, 지성소 등이 연이어 나오는 형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다.

카르나크 신전의 다주실 내의 원기둥, 천정을 보라. 아직도 채색의 상형문자가 보인다.
 카르나크 신전의 다주실 내의 원기둥, 천정을 보라. 아직도 채색의 상형문자가 보인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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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탑문을 통과하면 큰 안뜰이 나오는데 양쪽에 거대한 원기둥이 도열한 주랑이다. 한쪽 변이 100m가 넘는 직사각형의 뜰로 양쪽에는 작은 신전들이 들어서 있다. 이 작은 신전에는 테베 3신의 나룻배를 위한 제단이 있었다고 한다. 오페트 축제를 위해 나룻배를 이곳에 임시로 보관한 모양이다. 이제 곧장 제2탑문 쪽으로 가면 문 옆에 거대한 람세스 2세의 조각상이 보인다.

파라오의 다리 사이에 있는 조각상은 그의 딸이라고 하는 빈트 안타이다. 람세스는 49명의 아들과 53명의 딸을 뒀는데 그중에서 가장 아낀 자식이 바로 이 딸이었다고 한다. 누구는 그녀가 람세스의 아내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는 근친상간이 널리 인정되던 시절이니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리라.

이제 곧장 제2탑문을 통과해 원기둥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거대한 원기둥이 방안에 빼곡하게 차 있다. 모두 높이가 20m가 넘는 초대형 원기둥이다. 원기둥을 자세히 보면 수많은 상형문자와 함께 각종 그림이 그려져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채색의 그림과 상형문자가 지금도 여전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3000년이 넘은 신전인데 어떻게 저렇게 채색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실로 놀라운 일이다.

알 수 없는 운명 앞에 인간은 언제나 왜소하다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앙의 오벨리스크가 투트모시스 1세의 것이고, 오른쪽이 그의 딸 하트셉수트의 것이다.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앙의 오벨리스크가 투트모시스 1세의 것이고, 오른쪽이 그의 딸 하트셉수트의 것이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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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탑문과 제5탑문 사이에서 꼭 봐야 할 것은 오벨리스크다. 현재 두 개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는데 하나는 투트모시스 1세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딸이자 최초의 여자 파라오 하트셉수트의 것이다. 원래 이곳에는 6개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었다고 한다. 하트셉수트의 것은 아버지 것보다 10m나 더 높다. 정확히 29.56m. 현존하는 오벨리스크 중 두 번째로 높은 것이다. 참고로 첫 번째는 그녀의 양아들 투트모시스 3세의 것으로, 현재 로마 지오바니 광장에 있는데 32.18m라고 한다. 이 두 사람 간의 관계는 매우 불편했던 모양이다.

하트셉수트는 20년 동안 섭정을 하면서 결국 자신이 파라오가 되는데, 사후 투트모시스 3세는 하트셉수트 격하 운동을 했던 모양이다. 그녀와 관계있는 각종 기념물을 파괴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오벨리스크를 만들 때 적어도 몇 m는 더 높게 만듦으로써 양모에 대한 원한을 표시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여하튼 상상해 보자. 한 때 이곳에 6개의 오벨리스크가 그 표면에 황금이 도금된 상태에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반짝이던 장면을... 상상만 해도 장엄하지 않은가.

지성소를 간단히 본 다음 발길을 돌려 근처 신성호수에 갔다. 이곳은 이집트에서 가장 큰 신성호수다. 사제들이 직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이곳에서 몸을 씻었을 것이다. 그 곁을 보면 붉은 화강석으로 된 쇠똥구리 신인 케프리가 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는 어둠을 물리치며 떠오르는 태양과 아침을 다시 탄생하는 파라오를 상징한다. 이곳에서 탑돌이 하듯 돌면 소원이 성취되는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런 속설은 어디에든 있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그런 존재다. 알 수 없는 운명 앞에 인간은 언제나 왜소하지 않는가. 그러니 나도 돌고 싶다. 나는 무엇을 빌면서 돌아야 할까. 한참 생각하다가 혼자 웃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사실 나도 빌 것이 많았는데...


태그:#세계문명기행, #나일문명기행, #이집트, #룩소르, #카르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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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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