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06년 이후 거의 6년 만에 다시 찾은 파리는 외관상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건물은 과거의 자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지하철에서는 그토록 힘들어하던 쾌쾌한 냄새가 여전히 나를 반기고 있다.

 

한국에서는 종종 "어! 이런 건물이 언제 세워졌지"라고 말하곤 했지만, 파리에서는 "야!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네"라고 나는 반대로 말하게 된다. 이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은 10년 전의 도서관 의자가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이곳에서 일주일도 채 머물기 전에 나는 이 도시의 새로운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 같은데 도대체 내가 느끼는 새로움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편안함'이었다.

 

나는 이 편안함이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답은 의의로 간단했다. 그것은 이곳에서는 타인에 대해 그다지 큰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데에 있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즉 '다양하게 살 권리'가 이곳에는 있었다.

 

 

복장과 신체의 다양성

 

우선 복장과 신체를 예로 들어보자. 어느 날 나는 파리 소르본대학 근처의 룩상부르크 공원을 가로질러 가다가 한 털보 아저씨가 짧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조깅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사람들은 그 아저씨를 한번 가볍게 보고는 웃고 있었다. 몇몇 꼬마들은 함께 뛰면서 사인해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또한 나는 수퍼맨 바지를 입고 지하철을 타는 사람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어떤 말로 표현하기 힘든 편안함을 느낀다. 나도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마음대로 입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단순히 복장의 문제로 이런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더 넓게 보면 그곳에는 피부가 나보다 하얀 사람도 있고 까만 사람도 있다. 키, 체중, 머리 크기도 사람마다 크게 차이가 난다. 물론 한국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일 수 있겠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신체적 차이가 매우 크다는 것이다.

 

작은 차이가 아니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과거에 내가 만났던 한 한국 유학생은 "이곳에서는 키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 행복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점를 두고 말했던 것 같다. 물론 이곳도 인종차별이 있으며, 보이지 않는 문화 자본을 통해 특권 백인 계층이 자신들의 부를 이어간다. 하지만 그런 날카로운 비판을 들이대기에는 확실히 이곳 사람들은 일상에서 한국보다 더 자유롭게 행동하고 말한다.

 

고정관념의 파괴

 

두 번째는 고정관념의 파괴가 주는 편안함이 있다. 파리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새벽이었다. 바깥에서 사이렌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소리에 깨어보니 오토바이를 탄 사람을 경찰차가 쫓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둘 다 경찰이었다. 그들은 다시 내 방 앞 도로에 와서는 서로 웃으면서 또 같은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경찰들이 경찰차와 오토바이를 타고 서로 장난을 치다니 내가 아는 경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이 외에도 경찰이 4차선 대로에서 무단횡단을 하고, 다 큰 성인 남자가 아기 젖병에 우유를 담아 빨고 다니는 모습을 나는 이곳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런 풍경을 어디까지 일반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서로가 웃고 즐기면서(내 눈에는 종종 일 안 하고 노는 것처럼 보인다!)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모습을 이곳에서는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과거 유학 시절에 내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환경에서 가능했었던 것 같다. 다시 정리하면 파리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으며, 그것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문화적 차이와 신기함

 

이는 분명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적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끝내기에는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복장이나 신체적 차이 그리고 사람에 덧씌우는 고정된 이미지가 가져오는 일상의 스트레스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남자 키 180cm가 안 되면 루저라는 대학생의 발언이나, 자신을 배척하는 사회에 대한 복수로 연쇄방화를 저지른 다문화가정 학생에 관한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면 종종 이런 공상을 하게 된다. 모든 면에서 현격하게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게 되면 복장, 신체의 차이, 고정된 이미지는 서서히 사라지지 않을까? 실제로 나는 파격적인(?) 복장과 헤어 스타일을 한 사람이 한국 사회에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문화 가정도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거리에서 더 많은 외국인을 보았으면 좋겠고, 더 많은 무슬림, 더 많은 유대인들을 만나고 싶다.

 

분명 이는 한국 사회에 다른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다양하게 살 권리'는 분명 더 커질 것이다. 잘 보이지도 않는 미시적인 압박으로부터도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고려해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는 신기함이다. 그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이런 부분까지 비판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내가 루마니아에 갔을 때 놀랐던 것은 흑인과 아시아인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 사람들은 종종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한 번은 거리에서 루마니아 학생들 무리가 나에게 "헬로, 헬로" 하면서 말을 걸기도 했다.

 

이것은 어떤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르기 때문에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다르다는 이유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있다. 어느 나라이든 간에 외국인이라고 바가지를 씌우거나 희롱하는 태도는 엄하게 처벌해야 할 것이다.

 

다양하게 살 권리

 

'다양하게 살 권리'가 인정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편안함은 인권과 관련하여 하나의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인간답게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 타인들로부터 존중받는 데에 있다. 인권운동은 바로 이를 위해 노력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 노예, 농노, 가난한 노동자에게 참정권과 시민권이 중요한 순간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이 권리들이 인정되기 시작하자, 행복한 삶을 살 기본적 사회권이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이제 이러한 권리들을 인간이 가져야 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여기에 '다양하게 살 권리'가 추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복잡한 정치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고정 관념'에서 탈피하면 되는 간단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의 존중은 인권이 보호받는 사회를 만드는 근본 원리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도망쳐야 한다. 낡고 고정된 세계는 지금도 너를 뒤쫓고 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는 충북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입니다.
* 이 기사는 대전충남인권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다양성존중#고정관념파괴#다양하게 살 권리
댓글

대전충남인권연대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소중한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세계평화의 기본임을 천명한 세계인권선언(1948.12.10)의 정신에 따라 대전충남지역의 인권현실을 개선시키기 위해 인권상담과 교육, 권력기관에 의한 인권 피해자 구제활동 등을 펼치는 인권운동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