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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여진 에세이 <연애>.
김여진 에세이 <연애>. ⓒ 클 출판사
그녀가 '수작'을 걸어왔다. 그것도 아주 대놓고. 그렇지 않아도 언제부턴가 눈길이 가던 터였다. 마음도 아주 조금. 그래서 혹시나 하는 기대에 덥석 손을 내밀었더니 이를 하얗게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행복해보였고, 함께 있으면 어쩐지 나도 그녀처럼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그녀, 김여진과의 '연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연애>. 책 제목이다. 왠지 '그녀답다'고 느꼈다. 멋들어진 부제를 붙였을 법도 한데 없다. 책등에 '김여진 에세이'라고 얌전하게 적혀있을 뿐이다. 그럴수록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녀, 김여진이 말이다.

얼결에 연극 무대에 오른 것이 배우 삶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몇년 뒤, 평생 무대에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할 즈음 소문을 듣고 찾아온 누군가가 영화 시나리오를 건네며 오디션을 보러오라 했다. 당돌하게도 2차 오디션을 거부한 그녀에게 어찌된 일인지 한달 뒤에 합격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튼 그렇게 찍은 첫 영화가 임상수 감독의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였다. 그녀의 이름은 '순이'였다.

배우 김여진, 소셜테이너가 되다

그 뒤로 영화 <박하사탕>(1999)의 '홍자', <취화선>(2002)의 '진홍' 그리고 드라마 <대장금>(2003)의 '장덕', <토지>(2004)의 '강청댁', <이산>(2007)의 '정순왕후' 등 그녀가 살아낸 인물들이 하나둘 늘어갔고, 그녀는 그렇게 점점 '낯익은' 배우가 되어갔다. 아직 '김여진'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던 2010년 가을, 서울대학병원 청소노동자들이 부당 해고에 맞서 파업을 벌인다는 소식을 접했다. 트위터에서였다. 그리고 몇달 뒤, 무대에 서기 위해 여느 때처럼 국립박물관을 거닐던 어느날, 비로소 한 사람 두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엄마를 부탁해>라는, 그녀가 출연하고 있는 연극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날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깨끗이 살게 한 엄마, 세상의 모든 엄마들. 심지어 무시하고 하대했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겨울엔 손 씻을 공간이 없다며 서울 종로구 환경미화원이 1인시위를 하는 모습이 트위터로 날아들었다. 그걸 보며 그녀는 버릇처럼 상상을 해보았다. "새벽 청소를 마치고도 손을 씻지 못하고 버스에 오르는 그 사람의 마음"을. 그녀는 배우니까.

그리고 2011년 1월, 이번엔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농성 소식이 들려왔다. 농성 7일째 되던 지독히도 춥던 날. 무슨 마음에서였을까. 홍익대에 가보자 마음을 먹었다. 자신을 못 알아보면 어쩌나하는 걱정과 함께 찾아간 그곳에서 사진 찍자고, 사인해 달라고 하던 아주머니들을 만났고, 고마웠고, 금세 친해졌다. 그래서 같이 밥도 한 끼 먹었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홍자' 역을 맡은 김여진.
영화 <박하사탕>에서 '홍자' 역을 맡은 김여진. ⓒ 유니코리아

그날 그 자리에서 총학생회장을 만났다. 자신을 '비운동권'이라고 소개한 잘 생긴 청년이었다. '학습권'을 주장하러 찾아온 그에게 어머니들은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다"고 했고, 곁에서 지켜보던 그녀는 목이 메었다. 학교를 빠져 나오며 그녀는 "내가 조금만 더 인기 있는 연예인이었으면 좋겠어"라고 아주 오랜만에 생각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단숨에 쓴 글이 바로 그 '밥 한 번 먹자'로 알려진 글이었다. 어딘가 눈에 익었던 그 배우가 소셜테이너 '김여진'으로 거듭나던 순간이었다.

소셜테이너 김여진, 김진숙과 사귀다

그녀의 글 한 편에 세상이 술렁였다. 그래서 이번엔 작은 일이라도 꾸며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번개'를 시도했고,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 추위를 뚫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 붙인 모임 이름이 바로 '날라리 외부세력'이다.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모두가 따뜻한 실내에 모여 있던 그때, 홍대 정문에서는 청소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시위가 한창이었으나 누구도 그곳에 가보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부터도 그 추운 겨울 바깥에서 집회를 하고 싶지 않았다. 구호를 외치는 것도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도 어색하고 내키지 않았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다."

그런 '날라리'들이 모여 사람들에게 돈을 모아 <조선일보>에 광고를 실었다. '홍대 총장님, 밥 한 번 먹읍시다'란 제목으로. 첫 번개를 한 지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그 뒤로 '우당탕탕 바자회'를 열어 후원금을 모으기도 했고, 농성이 끝난 뒤에는 '날라리 밴드'를 결성해 작은 파티를 열기도 했다.

바로 그날이었다. 그녀의 트위터 친구이자 '날라리 외부세력'의 친구였던 김진숙이 편지를 써서 보내온 것이다. 크레인 위에서 직접 쓴 편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울었고, 낭독이 끝난 뒤 그녀가 먼저 입을 뗐다.

"난 내일 갈래. 보고 싶어서 가야겠어."

그 뒤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그녀는 혼자서, 날라리들과 함께, 또 희망버스를 타고 김진숙을 만나러 갔고, 홍익대 농성 때보다는 조금 더 무거운 마음으로, 그래도 늘 웃으며 즐겁게 싸웠다. 그리고 농성이 시작된 지 305일째 되던 날 김진숙과 뜨겁게 얼싸안았다. 두 발을 모두 땅에 디딘 채로.

김여진처럼 세상과 연애하기

신이 나서 옮기다보니 길어졌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책에서 들려준 이야기의 첫 4분의 1 쯤이다. 아마도 우리가 익히 보고 들어 알고 있는 '김여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어쩌면 인간 '김여진'의 아주 작은 부분들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 나머지는 그녀에게 직접 들어보기 바란다.

 소셜테이너 김여진. 한진중공업 조선소에서 '날라리 외부세력'과 함께 내려가 찍은 사진.
소셜테이너 김여진. 한진중공업 조선소에서 '날라리 외부세력'과 함께 내려가 찍은 사진. ⓒ 거다란

여기 사진 한 장이 있다. 바로 그녀, 김여진이 누구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언뜻 어느 부둣가에서 찍은 사진으로 보이지만 아니다.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비장한 구호가 나부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문득 김진숙이 못 견딜 만큼 보고 싶어져서 먼 길을 한걸음에 달려간 그날, 가파르고 좁은 85호 크레인의 계단을 올라 저만치 위에서 봄 같은 미소를 띠고 있던 김진숙을 처음 만난 그날, 김진숙이 우렁찬 목소리로 사인을 해달라길래 하얀 종이에 "웃으며, 함께, 끝까지"라고 꾹꾹 눌러 적어준 바로 그날, 기계가 멈춘 한진중공업 조선소에서 찍은 사진이다.

함께 그곳에 간 '날라리 외부세력' 가운데 누군가가 찍어준 이 사진은 꽤나 많이 리트윗 되었고, 어떤 이들은 '남의 파업 현장에 가서 뭐하는 거냐'고, '개념 없다'고 근엄하게 야단을 쳤다. 따지고 들자면 그럴 만도 하다. 누군가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있는 현장에서, 그것도 투쟁 구호가 나부끼는 곳을 찾아, 걱정이라곤 전혀 없는 표정으로 한껏 멋을 부리며 찍은 사진이 거슬렸을 법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바로 그녀가 세상과 '연애'하는 방식인 것을.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반해버리고 마는 것을.

"사람들이 내게 왜 '사회적인 이슈'에 참여하게 되느냐고 물을 때 주로 '나 좋자고' 또는 '그게 행복해서'라고 말하게 된다. 진심으로 좋아서, 행복해서 하고 있는 일이어야 힘이 붙는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결국 그녀의 방식이 옳았다. 홍익대에서도 그랬고, 한진중공업 조선소에서도 그랬다. 많은 사람의 힘이 필요할수록 "자신이 즐거운 방식으로 가볍게 하는 게 중요하다"며 "스스로에게 정말 솔직해야 한다"고 말하던 그녀의 믿음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곳으로 모여들게 했다.

스스로에게 솔직하면서, 자신이 즐거운 방식으로. 벌써 꽤나 시간이 흘러 어느새 잊혔지만, 또 물론 그녀 혼자 이룬 일도 아니었지만, 그녀가 그런 식으로 움직이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그처럼 오래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먼저 지쳐서 그만두었을 테니.

그녀가 세상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 

소셜테이너로서 주목을 받자 그녀에 대한 '간섭'이 늘었다고 한다. "연예인이면 연예인답게 행동하라"는 협박에 더해 최근엔 "소셜테이너로서 이런 발언이나 행동은 해야 되지 않나"라는 압박도 늘었다고 한다. 그런 '간섭'들을 보며 그녀는 그저 웃을 뿐이다. 처음 시작할 때처럼 지금도 그녀는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할뿐이니까. 그녀가 책으로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큰 선거를 앞두고서도 어디에 마음을 둬야할지 몰라 답답하기만 한 요즘. 그녀와의 짧은 연애가 나를 다시 설레게 했다. 희망에 부풀게 했다. 그녀라면, 그녀가 하는 대로라면 다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바람이 일었다. 대의와 희생의 언어 뒤에 숨어 제 잇속만 챙기려는 탐욕스런 사람과 무리들 틈에서 그녀의 솔직하고도 당당한 고백은 더 없이 아름다웠다. 잠깐이라도 그녀와 '연애'를 해본다면 아마 당신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러니 혹시 당신도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절망에 잠겨 있다면 그녀의 수작을 받아주기 바란다. 못 이기는 척.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다. 나의 꿈, 나의 행복을 위해서다. 그러니 웃으며 뚜벅뚜벅 간다. 심각할 이유, 없다."


#김여진#연애#소셜테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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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2023),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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