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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철 '봄- 그리고'
정영철 '봄- 그리고' ⓒ 정영철

그림 중에서도 사실적 화풍의 풍경화를 보러 화랑에 갈 때면 이제 막 여행을 출발하는 설레임에 젖어든다. 이미 본 적이 있는 곳을 새롭고 뜻깊게 해석한 예술가에게 '한 수' 배우는 즐거움도 보통이 아니지만, 미지의 풍경을 구경하게 되는 경우에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진다. '공짜'로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지난 29일 찾은 정영철 선생의 한국화전은 내게 '공짜 여행'이었다.

한지에 수묵담채로 그려낸 정영철 화백의 <봄-그리고>는 성산 일출봉을 형상화한 듯하다. 물론 다른 곳일 수도 있겠지만 보는 이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직 성산 일출봉에 가보지 못한 사람일수록, 그렇게 느끼게 된다. 섬의 형태, 가로로 이어지는 바다, 그리고 노란 유채꽃이 보는 이의 판단을 그렇게 지배한 결과이다.

특히 녹아 흐르듯 유채가 샛노랗게 흐드러진 화백의 제주도는 단순한 사실화의 경지를 뛰어넘어, 지금껏 보아온 낯익은 성산봉 풍경 그 이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화랑을 찾은 미술 애호가는, 성산 일출봉의 실경을 본 적이 있고 없고를 떠나, 낯선 여행자가 된다. 사진의 발명과 대중화가 회화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는 말도 있지만, 정영철 화백의 <봄-그리고>는 진정한 예술의 세계를 보는 이들에게 깨우쳐준다.

꽃의 흐드러짐을 그린 <남해에서>

 정영철 '남해에서'
정영철 '남해에서' ⓒ 정영철

<남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해를 찾은 관광객들은 흔히 남해대교로 들어가기 직전에 멈춰서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그곳에 주차장이 있고 식당가가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과 하동군 금남면을 잇는 한국 최초의 현수교와 그 아래로 멈춘 듯 흐르는 한려수도의 물길을 이곳만큼 잘 보여주는 곳도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남해에서> 역시 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정영철 화백의 꽃은 <봄-그리고>에서도 <남해에서>도 한결같이 한 송이 한 송이 또렷하게 세밀한 모습으로 피어있는 것이 아니라, 꽃잎과 꽃잎들이 한데 녹아 엉킨 듯 한몸이 돼 만발해 있다.

세밀화가 사실화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지만, 그러나 구경꾼에게 꽃은 '자연과학'이 아니라 '자연'이다. 사람에게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꽃밭'일 뿐이다. 사람에게 하나의 꽃은 '꽃 한 송이'이며, 어우러져 가득 피어난 꽃의 군집이 진정한 '꽃'으로 인식된다. 정영철 화백은 꽃잎 하나, 꽃 송이 하나하나를 그리지 않고 사람의 눈에 한 덩어리로 다가오는 꽃의 흐드러짐을 그린다. 그것이 진정한 실경이기 때문이다.

보는 이를 편안케 하는 화풍

 정영철 '도동일우'
정영철 '도동일우' ⓒ 정영철

<도동일우>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인 측백수림을 자랑하는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의 한 곳을 그린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림은 견훤군에게 대패하여 신숭겸이 죽고, 그가 용포를 입고 왕인 양 적군을 속이는 동안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왕건이 시량리를 지나 반야월 방향으로 도망칠 때 지나갔던 후삼국 시대의 길을 연상하게 해준다.

지금은 측백수림들도 일제의 남벌 탓에 많이 죽어버렸고, 평광리로 드나드는 길도 시멘트로 포장이 돼 정취가 빈약해진 상태이지만, 그림 속에서는 여전히 물이 넘치고 나무가 울창하다. 꽃을 흐드러지게 그리는 화백이 길과 숲과 물 또한 그렇게 묘파한 결과이다. 그래서 화백의 그림은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한다. 메마른 정경을 그리는 법이 없고, 세속의 이익을 다지듯이 날카롭게 사물을 세분하지 않은 덕분이다.

"작품에서 삶의 본질이 보인다"

 정영철 '그리고 우포의 하루 3'
정영철 '그리고 우포의 하루 3' ⓒ 정영철

정영철 화백의 그림은 우포늪을 그릴 때에도 여전한 인식을 보여준다. 화백의 우포늪은 아득한 늪 속에 아스라히 물풀 한둘이 떠 있는 고적한 풍경이 아니라, 물가의 나무와 갈잎들이 흐드러지듯 무성하다. 15년 이상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하는 수필가 김상립이 "선생의 작품은 분명히 실경을 소재로 삼았지만 실제보다도 더 풍부한 서정성과 감독을 화폭에 담아내었고, 그림 속 어딘가에는 삶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그런 요소를 배치하고 있다"고 말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전시회의 '작가노트'를 통해 "좀 더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섭렵하고 깨달아 운필과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조화로운 표현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정영철 화백은 대한민국미술대상전, 대구미술대전, 경상북도미술대전, 신라미술대전 초대작가이다. 이번의 제6회 한국화전은 대구 대백프라자 갤러리 B관에서 5월 29일부터 6월 3일까지 열린다.

 정영철 제6회 '한국화전', 대백프라자 갤러리 B관에서 열리고 있다. 5월 29일에서 6월 3일까지.
정영철 제6회 '한국화전', 대백프라자 갤러리 B관에서 열리고 있다. 5월 29일에서 6월 3일까지. ⓒ 정영철


#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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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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