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면 지겹고 안보면 그립고"... 오늘은 <시크릿가든> 마지막회 하는 날인데 보고 싶다. 이집트랑 한국이 시차가 7시간이니까 여기 시간으로 오후 3시에 하는데... <시크릿가든> 생각에 오늘 본 카르나크 신전은 흥미가 없었다. 여태까지 이런 신전 실컷 봐서 흥미가 없었다. '그래도 이런 건 마지막인데 잘 봐둬'라는 엄마의 말을 들어도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크긴 크더라. 어떻게 이런 것을 그 옛날 사람들이 만들었나 싶다..."2011년 1월 16일, 1년 전 14살짜리 딸애가 쓴 일기의 한 부분이다.
1년 전에 했던 여행의 기억을 떠올려 여행기를 쓰자니 여간 고역이 아니다. 소소한 기억인 줄 알고 건드려 봤더니 고구마 줄기처럼 주렁주렁 딸려 올라오는 것들이 있어 준다면야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머리를 쥐어 짜낼 수밖에.
나는 그때의 그 감흥을 되살려 내기 위해 애를 썼다. 찍어 온 사진들을 보고 또 보고, 세세한 여행루트와 비용을 기록해 놓은 메모장도 들춰 보고, 제일 믿을 만한 일기장을 펼쳐서 읽고 또 읽어 본다. 그러나 하루 종일 낯선 땅을 휘젓고 돌아다니다 숙소로 기어들어, 잠들기 전 억지로 눈 비벼가며 쓴 일기란 그다지 친절한 기록이 되지 못한다.
참 이상하게도, 사진으로 찍지 않은 순간들이 더 가슴에 남고, 기록하지 않은 사연이나 이야기들이 더 그립고 절실해진다. 그리하여 때로 진짜 추억은 내게, 사진 밖에 있고 기록 너머에 존재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왕국(BC 1550~1075) 시기의 수도, 파라오들이 지은 위대한 건축물의 전시장이라는 테베(룩소르)에 갔는데, 파라오 유적지 중 가장 인상 깊은 곳이라는 신전 '카르나크'를 안 가본 척 지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고민하는 내게, 딸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일기 쓰기를, 시험 끝난 바로 그날 학원 가는 것보다도 더 귀찮아하는 딸애가 그래도 군소리 없이 펜을 드는 유일한 때가 있으니, 그건 바로 여행할 때다. 그때는 24시간 이 엄마의 통제아래, 옴짝달싹 못하고 그날의 여행을 주저리주저리 기록해야만 안전하게 잠들 수가 있는 것이다.
일기장을 아무 데나 내깔려 두고는 "내 일기 봤지? 왜 보냐고!"하며 걸핏하면 몰아세우던 딸애가 선뜻 일기장을 내놓았다. 이집트 여행기를 쓴다니까 자신의 일기를 참조하라고 윤허(!)를 내리셨다. 감읍해서 들춰 보았더니 기껏 한다는 말이, <시크릿가든> 타령인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는 역시 정직하다. 폼을 잡자면, 온갖 미사여구를 나열해서 이집트 최대의 신전이라는 카르나크를 칭송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4천 년 역사의 고대 신전이 고작 20부작 드라마 <시크릿가든>한테 한참 밀린 격이다. 하기사 죽은 파라오보다는 살아있는 현빈이 훨씬 현실적이지.
나 역시 그즈음 지쳐 있었던 걸 기억해 냈다. 카이로 박물관부터 해서 아부심벨 신전, 네페르타리 신전, 필레섬의 이시스 신전, 왕들의 계곡, 하트셉수트 장제전에 이르기까지... 이제 신전이라면 신물이 날 지경이다.
독수리 얼굴을 한 호루스, 늑대 머리의 아누비스, 오시리스, 이시스, 새와 갈대와 손, 다리 등으로 이루어진 상형문자들로 가득 찬 신전의 벽면들은 더 이상 신기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러 명의 파라오들이 각축전을 벌이듯이 뛰어들어 만들어 낸 이 위대한 건축, 카르나크 신전에 감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제 우리의 여정은 후루가다에서의 다이빙과 사막의 작은 오아시스 마을을 찾는 일만 남았기에, 아마 나는 그렇게 강조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건 마지막인데 잘 봐둬."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딸은 일기에 썼다.
아이구나, 세상에! 그건 바로 나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나 역시 이미 신전과 빼곡한 상형문자들에 지긋지긋해져 있었던 게 분명하다. 자꾸만 무심해지려 했던 나 자신을 일깨우고자, 마지막이다 마지막이다 이제 더는 볼 기회가 없다, 최면을 걸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그 계절이 돌아온 지금, 나는 그곳이 너무나도 그립다. 벽면을 가득 채운 상형문자, 파라오의 가슴에서 교차하던 갈고리와 도리깨, 네메스(줄무늬 머리 장식)를 한 왕들의 모습, 벽마다 새겨진 부조들, 이 모든 게 얼마나 아름답고 신기한 것들이었는지 새삼 애틋해진다. 그것은 바로 테베의 일상이었고 생활이었으며 호흡이었다.
후루가다 가는 길길은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버스로 가면 너무 오래 걸린다고 해서 우리 가족은 혼자 여행하는 처자와 함께 게스트하우스에서 소개해 준 프라이빗 카를 탔다. 룩소르에서 떠나와 5시간 만에 후루가다에 도착했는데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버스를 더 길게 탔어도 괜찮을 걸 그랬다.
저물 무렵 황금빛이 더욱 그윽해지는 돌산들 사이로, 도로는 곡선을 그으며 빨려 들어갔다. 나는 고개를 빼고 운전석의 차창을 기웃거리느라, 아름다운 돌산 사막을 구경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어느덧 홍해 바다가 튀어나오고 우리들 입에서도 탄성이 튀어나오고. 주홍빛 석양을 바라보며 한 시간은 더 달려서 마침내 해안가 숙소에 이르렀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1월 2주 동안 이집트를 여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