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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아끼던 대학 후배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꽤 오랫동안 서울의 어느 지역위원회를 묵묵히 지켜온 그 후배는, 하필 말썽 많은 지역에 뿌리를 내린 탓에 남들보다 결혼이 늦었다. 지역 안의 온갖 억울하고 분한 사연들을 쫓아다니느라 정작 자기 앞가림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갑작스런 그의 결혼 소식이 더더욱 반가웠다.

결혼 소식보다 더 반가웠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날 식장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이 '두리반'에서 처음 만났다는 이야기였다. '두리반'.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라면 들어봤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 홍대 앞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칼국수집이다. 그렇다고 그 집 칼국수를 맛 본 적은 없다. 맛보다는 깡으로, 신문의 맛집 소개 기사보다는 사회면 기사로 이름을 알린 곳이기 때문이다.

재개발과 강제 철거에 맞서 무려 531일간의 눈물 겨운 농성 끝에 결국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금을 받아냈다는 바로 그 칼국수집이다. 두 사람은 그 531일 가운데 어느 날엔가, 바로 그 두리반에서 만났다고 한다. 아마 전기도 수돗물도 나오지 않던 그 동굴 같은 곳에, 언제 철거 용역들이 들이닥쳐 자신들을 끌어낼지 알 수 없던 그런 날이었을 것이다.

실은 그런 두 사람의 결혼을 지켜보는 동안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았다. 그날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무대에 섰던, 아마도 어두운 두리반에서 촛불 몇 개를 앞에 두고서 비슷한 분위기의 공연을 펼쳤을 노래패의 흥겨운 노래를 들으면서도, 또 직접 두 사람만을 위한 성혼선언문을 써와서 읽어 내려가던 두리반의 주인이자 소설가인 유채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랬다. 나는 두리반이 끝내 힘없이 쫓겨나고 말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절망에 빠진 나를 부끄럽게 만든 책

<꿈꾸는 자 잡혀간다> 겉그림
 <꿈꾸는 자 잡혀간다> 겉그림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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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랬다. 그 후배가 가끔 SNS로 올리던 두리반의 소식들을 볼 때도, 또 어쩌다 퇴근길에 공사용 철판으로 가로막혀 좁아진 두리반 앞을 지나갈 때도, 또 누군가가 두리반에서 열리는 모임에 같이 가자고 할 때도 나는 한 번도 희망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두리반에서 처음 만났다는 두 사람의 결혼을 지켜보며, 또 한 줄기 빛도 허락되지 않던 그곳에서 스스로 희망이 되어 끝끝내 두 주인 부부의 보금자리를 지켜냈던 이들을 보며 한없이 부끄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 두리반뿐이겠는가.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면서도, 홍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을 보면서도, 또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김진숙 지도위원의 투쟁을 보면서도 난 한 번도 희망을 떠올릴 수 없었다. 내게 그 모든 투쟁은 지켜보기조차 고통스러운, 그래서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절망일 뿐이었다.

그런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든 이가 있다. 송경동. 그는 시인이지만, 그 역시 신문의 문화·출판면보다는 사회면에 더 자주 이름을 올리는 이다. 그는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모든 절망스런 공간에 서있었던 인물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본 것도 기륭전자 앞 굴착기 위에서 농성을 벌이다 떨어졌다는 기사를 통해서였다. 2010년 가을이었다. '굴착기' 위에서 '농성'을 벌이는 '시인'이라니, 도대체가 어울리는 구석이라고는 없는 그 조합이 무척이나 낯설게 다가왔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의 이름을 다시 본 것은 한진중공업으로 향하는 '희망버스'라는 이름과 함께였다. 그가 바로 '희망버스'를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지난해 11월 그 일로 구속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산문집 한 권이 세상에 나왔다. <꿈꾸는 자 잡혀간다>. 체포영장이 발부된 뒤부터 틈틈이 준비해오다 유치장에서 마지막 교정을 본 끝에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갇힌 지 6일째 되는 날 시린 손을 불어가며 어렵게 써내려갔을 짧은 글도 이 책의 앞에 실려 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는 어쩔 수 없다는 이 시대의 감옥에서, 모든 억압과 좌절의 감옥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 나오는 꿈을 꿔본다." - 작가의 말을 대신하며, '여기는 감옥, 나는 나비다' 중

이 글을 보며 감옥에 갇힌 것은 그가 아니라 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대의 감옥, 좌절의 감옥에 말이다. 그의 책을 읽는 일은 그래서 정말이지 힘들었다.

그의 삶과 시를 이해하다

송경동 시인(왼쪽)
 송경동 시인(왼쪽)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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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를 읽는 일은 더더욱 힘들었다. 책에 실린 그의 시에는 대개 절망의 그림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죽어간 노동자를 떠나보내야 하는 날이면 그의 시가 늘 진혼곡처럼 공장을 떠다녀야 했다. 오죽하면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겠는가. 산 자들이 모여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그 숨 막히는 공간에서 시를 쓰고 읽는 그의 마음은 어떨까. 대체 그는 왜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책에서 그는 스무 살 무렵 처음 시를 배우던 시절에 읽었다는, 지금도 시구를 잊지 못한다는 흑인 여류시인 '니키 지오바니'의 시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대략 이렇다. "나는 어떤 백인도 나에 대한 이야기를 대신 써주길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나의 가난과 절망을 노래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당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흑인 공동체 공간인 할렘에서 살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였다."

송경동은 그렇게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렇게 시작된 시인으로서의 삶이기에 그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 쓸 수 없다.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만을 쓸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송경동이 아는 시의 처음이자 전부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시인 송경동의 삶과 시가 왜 그토록 고되고 힘겨운 곳만을 향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다. 그는 그저 자신의 삶과 자신의 시에 솔직할 뿐이다.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기에 앞서 그는 가난한 집에서 "노름쟁이 새끼"로 태어나 일찍부터 "용접조공으로, 배관조공으로 새벽밥을 먹고 잔업 철야를 밥 먹듯이" 해야 했던 노동자였다. 글 깨나 쓰는 시인으로 집회 현장에 들러 값싼 동정을 베푼 것이 아니라, 더 나을 것도 더 못할 것도 없는 같은 노동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음을 나눴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가 그 가슴 아픈 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곳이 바로 그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바로 그곳이며, 그 곳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도 바로 그, 송경동인 것이다.

그의 시와 산문이 이 빠르고 복잡한 시대를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가령, 그의 표현이 과격하다거나, 그의 시각이 편협하다거나, 또는 너무 오래된 이야기만 되풀이한다는 따위의 불평들이 있을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의 글은 날카롭게 날이 서있고, 오로지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의 곁에서만 쓰였으며, 또 지겨울 만큼 오래됐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들로 가득하다. 그것이 바로 송경동의 시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에 송경동의 시가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가히 초 단위로 쏟아지는 무수한 기사와 논평과 분석들 가운데 그의 시만큼 정직한 글이 있던가. 그렇게 책상머리에 앉아 그럴듯하게 끼워 맞춘 글들을 보며 세상을 읽어내려 애쓰는 우리의 모습은 그의 시를 비웃는 것만큼이나 우스운 일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런 허접쓰레기같은 글들에 비하면 온몸으로 부딪히며 써내려간 그의 시는 더없이 소중하다.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이 세상의 한 조각이나마 정직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글을 읽겠다.

송경동의 시를 보면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당신도 기억할 것이다. 암울하던 시대에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 새벽 쓰린 가슴 위로 /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노동의 새벽)고 구슬프게 노래하던 박노해가 있었고, '그러나 헤겔도 마르크스도 / 다음과 같이 각주 붙이는 것을 잊어버렸다 / 식민지 사회에서는 / 단 한 사람도 자유롭지 못하다고'(각주)라고 힘주어 말하던 김남주라는 시인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가난한 인력시장에서 / 불법으로 언제든 살 수 있는 / 64만원짜리 싼 기계들이 있었다'(너희는 고립되었다)고, 또 '빌어먹을 이런 개똥같은 게 세계화라면 / 나는 내 온몸에 불을 싸지르고라도 / 전 세계의 반민중적 세계화를 반대한다'(한미FTA는 내 시도 빼앗아간다)고 절규하듯 외치는 송경동이라는 시인과 그의 시가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 노동자들의 곁을 지키는 또 한 명의 노동자 시인이자 민족 시인, 민중 시인이자 혁명 시인이 바로 송경동인 셈이다.

당신에게도 그의 '희망'을 나눠주고 싶다

송경동 시인
 송경동 시인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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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큰 선거를 앞둔 올해, 한국 사회는 또 한 번 요동칠 것이다. 그렇다고 송경동 시인처럼 살 자신은 없지만, 깊은 절망감만은 어떻게든 떨쳐내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이다. 올해의 시작과 함께 펼쳐들었던 이 책을 당신과 함께 나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희망버스 한 번 타보지 않은 내가 그의 책에 대해 감히 글을 쓴다는 것이 부끄럽지만, 그가 시를 쓰고 책을 내는 것도 어쩌면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용기를 내보았다. '더 이상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 다른 세계를 꿈꾸지 못하는 / 이 가난한 마음들, 병든 마음들'을 위해서 말이다. 혹 당신에게도 이 시가 필요할지 몰라 마지막 부분만 조금 옮겨보겠다.

나와 우리가 진정으로 겪고 있는
가장 엄중한 산재는 이것이 아닐까
더 이상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꿈꾸지 못하는
이 가난한 마음들, 병든 마음들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중)

끝으로 그의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이라는 시에 실린 아름다운 시 한 편을 들려주고 싶다. 미처 다 읽지 못한 시집이지만 이 책과 함께 당신에게 꼭 권하고 싶다. 감옥에 갇힌 시인 송경동을 대신해 그가 전하고자 했던 '희망'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가 하루 빨리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를, 그리고 '여느 시인들처럼 / 꽃을,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던 그의 바람처럼 '산재시'가 아닌, 그가 쓰고 싶은 시를 마음껏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덧붙이는 글 | <꿈꾸는 자 잡혀간다> (송경동 씀 | 실천문학사 | 2011.12.12 | 1만2000원)



꿈꾸는 자 잡혀간다

송경동 지음, 실천문학사(2011)


태그:#송경동, #꿈꾸는자잡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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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2023),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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