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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제발 이러지마 너 지금 홀려 있는 거야."
"그러지 말고 3일만 들어 봐요. 내가 설마 형을 나쁜 길로 인도 하겠어요."

막무가내였다. 약속한 반나절이 지나서 사무실을 나가려 하자 막무가내로 막아섰다. 화가 났다. 인내력에 한계가 느껴지려고 했다. 덩치들이 또 막아섰지만 분노가 두려움을 잊게 했다. 그들과 거칠게 몸싸움을 하고 빠져 나왔다.

뒤따라 나온 인호가 길거리에서 다시 나를 붙잡았다. 화가 삭지 않아 거칠게 인호 손을 뿌리쳤다. 그순간 난 실망감에 가득 찬 인호 눈을 보고 말았다. 보지 말았어야 했다. 이때 인호 눈을 보고 마음이 약해진 것을 난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점심이나 먹을래? 잘 아는 집 있으면 가자."
"그래요. 점심 먹으면서 얘기 좀 해 보죠."

점심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강사가 하는 얘기가 구멍이 숭숭 뚫린 우격다짐 논리라고 얘기했다. 또 인간관계를 파괴시켜서 결국은 너를 파멸시킬 거라고 말해줬다. 인호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한 마디 했다.

"3일 동안 들어보고도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손 털게요. 그렇잖아도 요즘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들던 참이라서…… 형하고 난 늘 함께했잖아요. 3일만 들어봐요. 그리고 함께 걸어서 나가죠."

이 말에 난 무너지고 말았다. 인호를 구해 주고 싶었다. 분명 인호가 무엇엔가 홀려 있다고 믿었다. 눈이 와서 온 세상이 하얗게 되면 여우가 사람을 홀려서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는 옛날이야기처럼. 인호가 그렇게 피라미드라는 여우에게 홀려 있다고 생각했다. 3일 후에 인호를 구해서 데리고 나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사무실로 다시 들어갔다.

전용 숙소도 마련돼 있었다. 강남역 뒤편에 있는 술집 골목 부근 모텔이었다. 교육을 마치고 인호 때문에 모인 전우들과 포장마차에서 한 잔 걸친 후 맥주 몇 병과 안주거리를 사들고 모텔로 들어갔다. 모처럼 전우들이 한 방에 모이니 군대에 다시 온 기분이 들었다.

김진우는 세 달 밑 졸병(후임병) 최찬수는 두 달 위 고참(선임병)이었다. 하지만 군복을 벗고 만나니 모두 또래 친구 같았다. 우린 잠이 눈꺼풀을 강제로 덮을 때까지 술을 홀짝 거리며 얘기를 나눴다. 묵히고 묵혀서 곰삭을 대로 삭은 얘기를.

인호가 피라미드에 발을 들인 것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여자 때문이었다. 낮에 문 앞에서 내 앞을 가로 막던 여자였다. 이름은 고윤희, 160cm가 될까 말까한 키에 하얀 얼굴, 웃을 때 살짝 볼우물이 들어가는 귀염성 있는 얼굴, 적당하게 볼륨 있는 몸매에 분홍색 투피스를 입고 있던 여자였다.

인호보다 두 살 많았다. 사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인호를 데리고 나갈 자신이. 남자든 여자든 이성 친구가 생기면 동성간 우정은 약해지기 마련이기에.

"안녕하세요. 저 기억나세요? 어제 만났잖아요. 문 앞에서."

다음 날 아침, 사무실에 들어서자 고윤희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인호가 좋아하는 여자란 사실을 알고 난 후라서 그런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아~ 네 인호한테 밤새 얘기 많이 들었어요. 잘 해주신다고요."
"하하 인호가 내 얘기 했나요? 혹시 흉보지 않던가요?"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에 장난기 있는 웃음, 스치듯 만나 몇 마디 섞어 보았지만 한 눈에 시원한 성격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용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인호가 아마 저 시원함에 끌렸으리라 짐작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끌리는 법이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둘째 날은 좀 덜 지루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이 나와서 성공담을 들려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학창시절 대학가요제에 입상해서 텔레비전에 몇 번 출연한 사람이었다.

몇 년 전 피라미드가 처음 우리나라에 상륙할 때 시작했는데 지금은 한 달에 천만 원쯤 벌고 있다고 했다. 이사라는 높은 직급이었다. (주)거상산업 이사라고 적힌 명함을 교육받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입담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지루해질만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가지씩 던졌다. 그 중에 음담패설도 섞여 있었는데 그때마다 여자들이 까르르 거리며 자지러졌다. 음담패설을 남자들 보다 여자들이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게 됐다. 물론 모든 여자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재미있는 강의를 듣고 나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사무실 분위기가 좀 편안하게 다가왔다. 이래서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세뇌 돼서 피라미드에 빠지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 이 자식아. 네가 이러고도 친구야? 직장까지 그만두게 해 놓고 결국 이게 뭐야 빚만 지게 됐잖아…… 어떻게 할 거야, 말 좀 해봐 이 자식아."

사무실 부근 길거리에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점심식사 시간이었다. 아니 싸움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양이었다. 한 사람이 멱살이 잡힌 채로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주변에 같은 사무실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모른 체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고 손가락질하며 웃는 사람도 있었다. 내 눈엔 멱살잡이를 하고 있는 두 사람보다도 주변 사람들 행동이 더 이상하게 보였다. 싸움이 벌어지면 우선 말리고 보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 보편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나라도 말려야 할 것 같아서 나서려 할 때, 당하고만 있던 사람이 "이것 놔" 하며 멱살 잡은 손을 사납게 뿌리쳤다. 이어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내가 일부러 그랬어? 너도 돈 벌고 싶다고 그랬잖아. 네 발로 여기까지 온 거고…… 난 빚 없는 줄 알아, 왜 나한테 난리치고 그래, 너도 열심히 하면 되잖아."

이 말이 끝나자마자 진짜 싸움이 시작됐다. 주먹과 발길질이 오가다가 흥분한 한 쪽이 보도블록을 상대편에게 던지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다. 다행히 잽싸게 피해서 큰 불상사는 없었지만 위험한 순간이었다.

싸움은 잠시 후 끝이 났다. 첫날 내 앞을 가로막던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 몇 명이 황급히 달려 와서 싸움을 말렸다. 덩치들은 회사에서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나처럼 오자마자 빠져 나가려는 사람을 잡아두거나 싸움을 말리는 게 이들 임무였다.

주먹다짐까지 하는 큰 싸움을 말리지 않은 이유도 이들의 존재를 주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싸움은 이곳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덩치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난 몇 개월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됐다.  


#하얀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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