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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제 돌아오는 가을엔 마음껏 누리고 즐기거라!
 이제 돌아오는 가을엔 마음껏 누리고 즐기거라!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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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아!

오전 6시 50분에 울리는 증오스런 알람과 엄마의 소프라노 외침이 섞이면 겨우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도 거른 채 버겁게 하루를 여는 모습도 이제는 끝이로구나. 오전 7시 30분부터 자정 무렵까지 대한민국 고교생이 치러야 하는 고통스런 학교생활 또한 마감이로구나. 축하한다. 아들아!

아들아! 우선 용서를 구한다. 고교 생활 3년 동안 단 한 번만이라도 "공부 좀 해라!"라는 말을 안 하기로 작정했건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구나. 아들이 힘들어할 때 이유도 헤아리지 않은 채 어른의 시각에서 욕심을 부리기도 했으니 부끄럽기도 하구나. 이제 이해해다오!

 저 은행잎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나와 공동체의 가치를 터득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 가거라.
 저 은행잎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나와 공동체의 가치를 터득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 가거라.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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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에 진학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을 가늠하고, 나머지 인생의 빛깔이 결정되는 듯한 사회 속에서 아빠 또한 속으로 내 아들이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며 고통을 안겨 줬구나. 아들아! 비록 지면이지만 이 기회를 빌려 깊이 사과한다. 

아들아! 고교 생활 중 내신 성적 산출을 위한 십여 차례 정규 고사와 수능시험을 위한 수십 차례 모의고사를 치르면서 '시험을 잘 봤다, 못 봤다'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더냐.

아빠는 그 이유를 안다. 줄 세우기와 경쟁 교육에 사로잡혀 친구를 눌러야 내가 이기는 정글의 법칙을 그토록 증오했던 아들의 입장을 아빠는 충분히 이해한다. 입시경쟁 구조를 깨트릴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차라리 침묵으로 일관하는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성적표를 받아보고 싶은 아빠의 욕구를 자제하곤 했다.

이제 열아홉 청춘의 눈으로 세상을 보거라

 살다 보면 외롭고 쓸쓸할 때도 있다. 그 또한 사는 것 아니더냐.
 살다 보면 외롭고 쓸쓸할 때도 있다. 그 또한 사는 것 아니더냐.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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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이제 열아홉 청춘의 눈으로 세상을 보거라. 수능시험을 치르기 전날 컴퓨터 앞에 앉아 그럴싸한 자전거를 검색하더구나. 아빠는 마음 속으로 결정했다. 원한다면 자전거를 사 주마.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든 교실 밖 세상 속으로 힘차게 페달을 밟고 나아가 보렴. 달리기 위해 쉬어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로부터 자전거 여행의 묘미를 만끽해 보거라.

그뿐이더냐. 통제와 억압의 굴레로부터 온전한 자유인이 돼 세상을 다 가지거라. 아빠가 고3 때 가출했던 절간에도 가보고, 광화문에도 가보고, SNS 대열에 합류해 세상과 소통해다오. 여자 친구도 만나고, 부디 술도 바르게 배우고, 후회 없이 게임도 해보고, 욕망과 자제의 의미를 스스로 터득하거라. 

다만 한 가지! 이 세상 그 어떤 영웅도 책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진리만큼은 기억해다오. 문제풀이에 길든 고교 생활을 접고 이제 사람과 자연을 아우르는 공동체로 진입해 아들이 원하는 교직자의 꿈을 반드시 이루어다오.

 그 곳이 어디이든 너의 존재가 빛이 되기를 아빠는 소망한다.
 그 곳이 어디이든 너의 존재가 빛이 되기를 아빠는 소망한다.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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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진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양극화 문제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통 속으로 진입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거라. 대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고, 취업이라는 좁은 문을 거쳐 대한국인으로 우뚝 서기까지 그 과정들이 지난 고교생활보다 험난하다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그래도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성공한 사람의 후일담을 기억하고 치열하게 공부하는 삶을 이어가기 바란다.

아침마다 아빠와 함께 차를 타고 등교하면서 단 하루도 우리는 손을 놓은 적이 없구나. 등굣길 차 안에서 아빠의 오른손과 아들의 왼손이 하나 될 때마다, 침묵도 말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아들아! 이제 아빠가 직접 말로 하고 싶구나. 그 침묵의 언어는 모두 '고생한다'는 말이었다. 이제 현재형인 '고생한다'를 과거형 '고생했다'로 고쳐야겠구나. 대입수능치험 치르느라 고생했다, 아들아!

아들아! 무릎의 구부러지는 오목한 안쪽 부분을 오금이라 했지. 지난 12년 동안 접었던 오금을 곧게 펴고 저 장엄한 대한민국 광야에 우뚝 서렴! 사랑한다, 아들아!

2011년 11월 10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치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빠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시험을 마친 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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