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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약속이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기차를 타려던 계획을 바꿔서 차를 얻어 탔다. 고속도로의 힘을 너무 믿은 탓이다. 2시간이면 가겠거니 했던 예측이 3시간을 넘겼다. 결국 서울 서대문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오후 8시가 다 돼 도착했다. 이미 연구소에서는 퇴근 후 바삐 왔을 20여 명의 나이든 학생들이 한창 '열공' 중이었다. 얼핏 보니 20대 파릇한 여성부터 50대의 주름 깊은 남성 노동자들까지 다양하다.

살금살금 자리 하나를 찾아 앉았다. 김금수(73)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이 2주에 한 번씩 하는 '세계노동운동사' 학습모임 중 최근 시작한 5기의 공부시간에 지난 10월 19일 함께했다. 다음 날 인터뷰를 앞두고 미리 인사도 드릴 겸 찾아간 첫 만남이 엉망이 돼버렸다. 자리에 앉아서도 '이를 어쩌나' 맘을 졸였다.

늦은 저녁, '열공'하는 나이 든 학생들

발제자인 40대 여성의 발표는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인 1811년경 최고조에 올랐던 기계파괴운동으로 불린 러다이트운동으로 넘어갔다. 200년 전 역사를 들췄는데 참가한 노동자들은 오늘을 얘기한다.

"제가 입사한 1986년 3월엔 우리 공장 직원이 1만3000명이었는데 지금은 6100명이에요. 근데 생산량은 5배 늘었어요. 로봇들이 사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죠. 이런 현재에도 러다이트운동이 유효할까요?"

한 자동차공장 노동조합 간부가 토론거리를 던지자 '유효하다' '유효하지 않다' 갑론을박이 계속된다. 또 다른 참가자가 "산업화 초기에 노동자들은 어떻게 조직을 만들었을까?"라고 궁금해 하니 지하철 노동자가 "네댓 명만 있는 공장에서도 사장이 뭐라 하면 '못 참겠다'고 나서는 성질 급한 사람이 있지 않냐?"고 답한다.

모임 참가자들이 각자의 생각을 밝히는 동안 주관자인 김 이사장은 거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는다. 얘기를 들으면서 책상 위 흰 종이를 까만 글씨들로 채워갈 뿐. 앞에서 선생님이 설명하면서 칠판 가득 판서를 하면 학생들은 그대로 받아 적던 학교 때와는 전혀 다르다. 매번 달라지는 발제자가 토론주제를 내고 다른 참가자들이 궁금증을 보태 열띠게 토론한다. 그 열기에 잠시 지각사건을 잊고 말았다. 그런데 곧바로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선배하고 한 시간 약속도 못 지키면서…."

인사를 받는 대신 김 이사장이 방으로 따로 부른다.

"이렇게 대충대충 하면 지금 이 꼴 나는 기라."

김 이사장의 손가락이 허공을 찌르는데 가슴이 찌릿하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꼴'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느낌이 전해졌다.

다음 날 저녁, 다시 그 방에서 김 이사장과 마주 앉았다.

"술 한잔 들어가니까 잘 하대. 원래 혼나면서 배우는 거라."

인생의 선배이자 노동운동의 선배이자 선배 언론인인 그가 전날 일이 걸리는지 기자의 긴장을 풀어준다. 전날 뒤풀이에서 참가자들 한 명 한 명 챙기던 그의 모습이 겹쳐진다. 전날 야간일 끝나면 맥주컵에 소주를 가득 따라 마시는 노동자들처럼 술을 마시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하니 "잔 주고받는 게 번거로워서. 또 그렇게 하면 한 잔이 소주 반 병이니까 얼마나 마시는지 알기 편하잖아요. 난 딱 두세 잔이면 적당해" 하고 대답한다. 긴장감은 사라지고 훈훈한 분위기에서 인터뷰가 시작됐다.

"땅을 농민에게!" 했던 머슴들이 궁금했다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 뒷편에 미국 아마존 서점, 일본 고서점, 신촌 고서점 등에서 찾아낸 <세계노동운동사> 학습모임 교재의 귀한 참고서적들이 꽂혀있다.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 뒷편에 미국 아마존 서점, 일본 고서점, 신촌 고서점 등에서 찾아낸 <세계노동운동사> 학습모임 교재의 귀한 참고서적들이 꽂혀있다.
ⓒ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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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운동, 노동운동을 두루 거쳤는데 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았어요. 해방이 되자마자 마을 전신주에 삐라들이 붙는 거야. 일제 때 쓰던 교과서를 찢어서 거기다가 붓글씨로 써서 붙였는데 구호가 '경자유전(耕者有田, 직접 경작하는 사람이 땅을 소유한다)', '땅을 농민에게!' 이런 거야. 그걸 보면서 '누가 저걸 써 붙였을까' 궁금하더라고. 지식 있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며칠 지나니까 우리 동네에서 소작농이나 머슴 하던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죽창을 들고 노래를 부르면서 동네를 행진해. 또 몇 달 뒤엔 이들이 쫓기기 시작하면서 산에서 봉화가 올라. 그리고선 토벌대에 잡혀 내려와서 지서에 끌려가 반죽음을 당해서 경찰서로 실려가더라고. 지식 있는 사람도, 힘 있는 사람들도 아닌데 '경자유전, 땅을 농민에게'를 주장하다가 잡혀서 반죽임을 당하는 저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 그게 뭘까 계속 궁금하더라고. 이 질문이 끝까지 가고 있는 거지."

'물음'을 떠올려야 해답에 접근할 수 있다며 학습과 토론을 강조하는 그다. 인생의 좌표에도 물음표가 계속 따랐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마자 조선반도가 바로 38선으로 나뉘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한국전쟁, 박정희 정권 등을 지나면서 여전히 그에겐 '가난한 백성들이 그리는 세상은 뭘까?'라는 물음이 뒤따랐다. 그 역시도 일제 때 만주에서 트럭운전수를 하던 아버지, 일찍 여읜 어머니를 대신해 할머니를 모시고 굶주리며 살던 가난한 백성이었다.

― 중고등학교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중학교 때는 엄청 깡패짓을 많이 했어. 남녀공학이었는데 대대장을 하니까 줄도 세워야 하고 애들이 말을 안 들으면 종아리를 때리기도 했지. 연애하지 말라고 충고도 하고…. 그게 다 깡패짓이지 뭐. 고등학교는 부산고에 갔는데 학교 공부는 안 하고 후배들하고 일종의 독서 서클을 만들어서 책만 열심히 봤지. '암장'이라는 독서서클은 시골에서 부산사범학교로 온 친구들과 함께 했는데, 이들이 나중에 인민혁명당(인혁당),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 오랫동안 옥고를 치르거나 사형을 당하기도 했어요."

― 20대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활동을 했는데 민자통은 어떤 조직이었나.
"서울대 사회학과 4학년 때 4.19를 맞았어요. 4.19 이후에 변혁을 고민하는 민족민주청년동맹이라는 청년단체가 만들어지는데 내가 지금의 사무총장 격인 간사장을 맡았지. 그런데 청년운동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혁신정당, 개인, 청년단체 등 여러 부문이 함께 하는 통일전선운동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에 참가하게 되었지요. 민자통은 '민주적이고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하자'고 주장하면서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 학생운동을 포괄하는 통일전선체를 지향했어요."

― 4·19 이후 국민이 희망에 부풀었을 것 같은데?
"독재정권이 무너졌으니까 희망이 있긴 했지. 그런데 바로 그해 7월 29일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했어요. 진보세력은 거물정치인들 몇 명 빼고 거의 안 됐고. 민주당이 내세운 구호가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어. 국민들도 '민주당이 뭐 좀 해주겠지' 했는데 뽑아줘도 별로 바뀌는 게 없었던 거야.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61년 5월 13일에 민자통 주최로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군중대회를 열었어요. 대회는 2시부터 시작인데 12시부터 서민들이 엄청 와. 점심을 못 먹는 사람들인 게지. 주최 측에선 5만 명이라고 했어요. 원래 시위계획이 안 잡혀 있었는데 정부에서 깡패를 동원해 운동장 입구를 막으니까 사람들이 막 뛰쳐나갔어. 거리로 나서는데 동대문시장에서 노점하는 상인들, 판자촌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 구호도 넣어 달라'고 해. '대책 없는 판자촌 철거 반대' '노점상 권리 보장' 같은 요구들이 자연스럽게 나왔지."

민자통은 5월 16일 전주, 17일 대구까지 군중대회를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5월 16일, 박정희 등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탓이다. 군사독재정권이 시작되자 민자통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청년단체들은 비공식적으로 교류하게 된다.

"우리로서는 합법적인 활동을 하다가 길이 막혀서 비공개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건데 박정희 정권은 '국가 전복을 위한 전위정당'이라고 사건을 부풀렸지."

1964년에 일어난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이다.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추진하는 박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시위가 연일 일어나던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공안부 담당 검사들은 구속자들에 대한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기소장에 서명을 거부했다. 또한 1965년 1월, 재판부는 선고공판에서 도예종, 양춘우 2명을 제외한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4달 후 항소심 재판부는 "북한의 통일방안에 동조했다"는 찬양·고무죄로 도예종에게 징역 3년, 박현채 등 5명에게 실형·법정 구속, 김금수 등 6명에겐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10년 뒤, 인혁당 사건은 똑같이 되풀이된다.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해지자 박 정권은 다시 그 배후에 '인혁당 재건위'(2차 인혁당)가 있다고 발표한다. 1975년 4월 9일 재판부는 도예종, 서도원, 이수병, 여정남 등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선고 18시간 만에 형을 집행하는 '사법살인'을 단행한다.

2005년 국정원과거사위는 1·2차 인혁당 사건이 모두 고문 등에 의한 조작사건이었음을 발표하고, 2008년 법원은 사형수 8인에 대한 국가배상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50년 가까이 관련자들에겐 '간첩'이란 붉은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직장길이 막혔지. 공식적인 요시찰 인물이어서 거의 24시간 감시하다시피 했어. 동네 통장이나 복덕방에 형사들이 수시로 찾아왔으니까. 장사를 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어."

1차 인혁당에 연루돼 구속됐던 김 이사장은 제재소, 꽃 도매상을 하기도 했지만 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계속 허덕대게 되더라고."

'간첩'이란 꼬리표, 24시간 감시에 시달려

 김금수 이사장은 1970년대부터 노동운동에 몸 담으면서 수많은 노동자 교육들을 진행해왔다.
 김금수 이사장은 1970년대부터 노동운동에 몸 담으면서 수많은 노동자 교육들을 진행해왔다.
ⓒ 김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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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에 정책연구위원으로 한국노총에 들어갔는데 정권의 간섭 등은 없었나.
"그때 한국노총 집행부가 바뀌면서 '정책노총'을 내세웠어요. 그러려면 연구진을 뽑아야 하잖아. 누가 추천을 해줘서 갈 고민을 했지.

그때도 정보부에서 틈마다 왔는데 하루는 만나자고 해. 1975년에 2차 인혁당 사람들이 사형당한 후 유족들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여러 군데에 다녔어. 일본의 한 영화감독이 2차 인혁당 사건을 영화화하려고 한국에 온다는 거야. 이 사람들이 오면 분명 유족들을 만날 테니 날 보고 유족들한테 가서 그들을 만나지 말라고 전해달래.

남편들이 다 죽었는데 유족들이 그 말을 듣겠느냐고?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알던 친구들인데 나는 살아 있고 그 친구들은 죽었는데… 애들 학비도 못 보태주는데 그 말을 어떻게 하느냔 말이지.(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말해도 안 듣겠지만 말할 수도 없다'고 했더니 그쪽도 더 이상 별말을 안 하더라고.

이번엔 내가 '한국노총에서 연구원을 모집한다는데 내가 지금 생활도 어려우니 거기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어. '왜 그걸 우리한테 묻냐?'고 해. '그냥 가면 노동계에 침투했다고 할 거 아니냐'고 했더니 논의 좀 해보겠대. 다시 연락을 했는데 가도 괜찮다는 거야.

도대체 '왜 가도 괜찮다고 할까?' 궁금했는데 가보니까 알겠더라고. 거기가 직장이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뭐 하는지 알잖아. 누군가는 보고하도록 돼 있는 구조더라고. 자기들이 따라다니는 것보다 그 사람들한테 물어보는 게 훨씬 나으니까 가라고 했던 거지. 그렇게 거의 10년을 한국노총에 있었네."

― 해고로 한국노총을 나왔는데 해고사유는 뭐였는지.
"1970년대 민주노조들이 하나둘 생겨났지. 주말에는 민주노조에 가서 교육도 하고 상담도 했어요. 당시엔 노동조합에 관한 교육 강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으니까. 1985년 8월에 잘렸는데 6월에 구로동맹파업이 있었어요. 대우어패럴 등 그 친구들이 노총에 오면 내방에서 노보를 1천 부씩 복사해가니까 눈엣가시 같았겠지.

또 7월에 대한마이크로라는 전자회사 노동자들이 노총 위원장실을 1주일 동안 점거를 했었다고. 우리 정책연구실에 있던 친구가 집에서 라면도 끓여주면서 거기 사람들을 조직하는데 도움을 줬지. 그 친구들이 우리 방에도 자주 왔으니까 정책연구실장인 내가 끌어들였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또 5·18 이후 겸직 금지 조항이 생기면서 노총에 올라왔던 국장들이 현장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상근직원들의 발언권이 많이 커졌지. 그런 이유들이 작용했던 것 같아요."

정식 해고사유는 '재정난'이었다. 갑자기 조합 의무금이 줄어든 것도, 새로운 사업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재정난을 입증할 근거가 없었다. 함께 해고당한 6명 중 4명이 해고무효소송을 진행했고 승소했다.

하지만 한국노총을 나온 이들은 할 일이 없었다. 친절하게도 노총은 각 산별에 '천영세, 김금수 등은 교육강사로 부르지 말라'는 공문을 보냈다. 공간을 마련해 '한국노동교육협회'라 이름 붙였지만 교육을 요구하는 데는 거의 없었다. 받았던 퇴직금, 보상금을 까먹으면서 한갓진 월요일마다 함께 등산을 가고 가끔 번역 일을 하는 게 전부였다.

1987년, 이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김 이사장이 "그때는 손님들이 득실득실했지"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겪으면서 무수히 생겨났던 민주노조들이 회사와 단체교섭을 하기 위한 무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노동교육협회는 어떤 활약을 했나.
"노동자들이 투쟁은 했는데 노동조합을 어떻게 결성하고, 결성 후에는 뭘 해야 되는지 모르는 거야. 그때 '한국노총에서 10년씩 있었던 노동조합 도사들이 있다더라'면서 찾아들 오더라고. 서울지하철의 배일도가 오고, 서울대병원이 오고, 울산에서도 권영목(전 민주노총 사무총장), 오종쇄(현대중공업노조 위원장) 등과 만나게 되고.

초기에 집중적으로 교육한 건 창원 쪽이었어요. 창원과 마산수출자유지역공단에 한꺼번에 노동조합이 생겼거든. 140명을 한데 모아놓고 1주일 동안 교육을 했어요. 교섭의 ABC부터 가르치는 거야. '교섭 전에 교섭위원을 어떻게 짜라, 교섭에 들어가면 시간을 잘 지켜라,  논리가 막히거든 정회를 요구해라, 교섭결과는 조합원들한테 알려야 한다' 등. 그러면 교육받는 사람들이 메모를 해서 사업장에 가서 그대로 하는 거지.

맨 처음에 하는 건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를 이해시키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교섭이 안 되니까. 근로기준법을 보면 임금을 '노동의 대가'라고 하거든. 그걸 갖고 회사 측에서는 '장사가 잘 안 됐다' 식으로 자꾸 임금교섭에 나오는데 그게 아니거든.

아주 쉽게 설명을 하지. '아침에 일어나면 뭐 합니까?'라고 물으면 사람들이 '전깃불을 켠다, 휴지 가지고 화장실에 간다' 식으로 대답을 해. 그러면 '그게 다 상품이고, 상품에는 원가가 있다'라고 설명을 하는 거지. 교육 마지막은 '쟁의는 어떻게 하나'로 끝나. 사용자 쪽에서는 이런 체계적인 교육을 안 받고 이쪽은 받았으니까 교섭을 하면 당연히 이쪽이 이기는 거지."

김 이사장이 한 사업장을 예로 든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임금교섭에 들어가자 사용자쪽은 "올해는 임금을 동결하고 내년 되면 적자도 갚을 거니까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하자"고 나왔다. 이에 교섭위원으로 들어간 경상도 출신 간부는 이렇게 대꾸했다.

"마, 자갈 뽀사 묵고 모래똥 싸는 소리 하지 마라. 우리가 이 회사에 빚 갚으러 온 사람들이 아니다 말이다. 우리는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야 노동을 할 거 아이가. 노동능력에도 원가가 있다고 하더라. 그게 생계비 아이가."

결국 교섭은 결렬되고 파업에 들어갔다.

"350명 조합원이 72일 동안 파업을 하면서 노래도 배우고, 일일 벽보도 만들고, 집안사정 속속들이 알면서 관계가 완전히 끈끈해지는 거지. 그렇게 교육이 지금하고는 완전히 달랐지. 현장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었으니까."

― 현재는 1987년보다 여건이 좋아졌지만 노동자교육은 훨씬 침체되었다. 그 이유는 뭐라고 보시나.
"노동조합이 교육기관도 많아지고 교육 기회도 많은데 간부들이 아는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어. 다 아는 것 같은데 하나하나 따져 물으면 몰라. 상층간부들이 기본적인 교육도 받고 토론도 해보고 경험도 쌓여서 올라오는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동료나 정파의 등쌀에 밀려서 올라오다 보니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 거지. 근데 일정한 지위에 있으니까 모른 척 할 수도 없거든. 술자리에서 들은 풍월로 '썰'은 푸는데 들어보면 알맹이가 없는 거지.

그래서 내 주장이 바로 '한 달에 두 번이라도 공부하자'지. 지속적으로 고민거리를 만들어보는 게 중요해요. 노동조합에서는 일회성 교육만 하는데 어떻게 보면 그게 오히려 해악을 끼칠 수도 있거든. 시건방만 느는 거지. 예를 들어 '안철수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교육을 잡았다 치자고. 그건 강사 성향에 따라 얼마든지 주관적인 설명이 가능한 거야.

어제 한 학습모임도 교재에 러다이트운동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장을 함께 비교해 제시해놨어요. 여러 갈래 주장의 차이점이 뭔지 보라는 거지. 누구 의견이 제일 맞다는 건 주관적인 것이니까. 2007년 7월에 시작한 1기 학습모임은 햇수로 벌써 5년째야. 1·2기가 함께 1박 2일 워크숍을 갔는데 한 참가자가 '여행을 즐기고 있다'고 말하대. 그만큼 공부를 즐기게 된 것이지."

한 달에 두 번이라도 공부를 하자!

 세계노동운동사의 권위자이기도 한 김금수 선생은 제3세계 수많은 활동가들과 친분이 있기도 하다. 1997년 브라질 노동자당(PT) 사무실에서 룰라 브라질 전 대통령과 함께 토론하는 장면.
 세계노동운동사의 권위자이기도 한 김금수 선생은 제3세계 수많은 활동가들과 친분이 있기도 하다. 1997년 브라질 노동자당(PT) 사무실에서 룰라 브라질 전 대통령과 함께 토론하는 장면.
ⓒ 김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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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모임을 정리하면서 "의식이 쌓여서 투쟁하는 걸로 착각들 하는데 투쟁 속에서 의식이 쌓이기도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원풍모방이 1970년대 대표적인 민주노조였어요. 조합원을 10명 단위로 묶어서 조별로 매주 토론을 하는 거지. 조장이나 반장한테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은 건 없는지도 묻고 함께 근로기준법도 배우고. 그게 바로 현장조직이지. 지금처럼 선거조직이 된 현장조직 말고.

거기에 장남수란 여성이 있었는데 국민학교 5학년 중퇴자야. 이 친구가 자기들 투쟁사를 엮어서 <빼앗긴 일터>라는 작품을 냈지. 동일방직에서도 한 친구가 <공장의 불빛>이란 비슷한 작품을 썼는데 투쟁을 거치지 않았으면 그런 작품들이 나올 수가 없지. 세상을 보는 눈이 떠진 거야.

교육 100시간 해서 될 문제가 아니란 말야. 의식이란 게 책을 읽으면서 높아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론 작든, 크든 투쟁을 통해서 직접 느끼는 거지. 왜 조직이 중요한가, 해보니까 저쪽 힘이 강하니 그냥 덤비면 판판이 깨진다, 이런 걸 몸으로 부딪혀서 알게 되는 거야. 역사의 흐름을 보면, 오히려 행동이 앞서고 그 다음이 조직, 그 다음이 의식, 마지막이 정당이 되더란 말이야."

― 한국노동교육협회 초창기에 만났던 배일도, 오종쇄 등이 이후엔 노사협조주의로 돌아섰다는 비판도 있는데.
"기본적으론 사상, 이념의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세계운동사를 공부하는 것도 단순히 역사를 바로 알자는 것이 아니라 그걸 통해서 노동운동이 지향하는 변혁의 정신을 살피자는 거지.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보면서 신념이나 이념, 노선이 성립되지 않으면 현장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이 원체 각박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이탈할 수 있다는 거야.

더구나 현재와 같은 기업별 노동조합이 중심이 될 때는 더 그렇지. 거기서 잘려 나오면 바로 조직과 떨어진 생활을 하는 거니까. 정말 옳은 지도자가 되려면 이념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할 정도의 각오가 돼 있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상황에 따라 이탈될 가능성이 매우 커."

― <한겨레> 등에 1980년대 후반부터 노동칼럼을 써오고 KBS 이사를 하는 등 언론과의 인연도 깊다.
"우리처럼 일정한 고정수입 없이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상근으로 일하면서 활동비가 나오는 자리들이 필요하지. <한겨레> 논설위원이나 KBS 이사 등은 모두 그런 자리였어요. <한겨레> 논설위원을 12년 했어요.

언젠가 지하철에서 파업을 하니까 정부는 지하철에서 근무하다 군대 간 사람들을 투입한다는 거야. 대체노동이 금지된 법 조항을 소개하면서 '노동조합이 법을 뛰어넘었다고 회사나 정부도 뛰어넘겠다는 얘기냐?'고 했지. 아예 칼럼 제목을 '지하철은 설 수도 있다'로 달기도 했어요. 노태우 정권 땐데 빌딩 경비실에 정보원이 상주하다시피 했어요. 그래도 나중에 보니까 내가 쓴 사설, 칼럼 보고 현장에 갔다는 사람도 있더라고.

KBS 이사를 하기 전에 전에 DJ 정부 때 KBS 시청자위원을 했어요. 노동계 대표로. 그때 다큐멘터리 박정희 3부작을 만든 적이 있어요. 내용이 지금 이승만 특집 하듯이 박정희 찬양 일변도였지. 박정희가 독일 가서 차관을 받아오지 않았으면 경제개발이 안 됐던 것 마냥.

시청자위원회가 열렸는데 가서 그랬지. '경제개발계획은 이미 민주당 때 세워져 있었다, 박정희식으로 안 하고 민주화도 하고, 좀 분배도 하면서 경제개발을 했으면 성장이 조금 늦었을지라도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사장 마음에 들었나봐. 2000년에 이사가 교체될 때 날 추천했더라고. 2006년에 다시 할 때는 나이도 제일 많고 노사정위원장도 했다고 이사들이 이사장으로 뽑아줬고."

김 이사장은 KBS이사회 이사장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한 채 스스로 그만뒀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이 한창 달아올랐던 2008년 5월이었다. 이명박 정권이 언론장악을 노골화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당시 KBS 노조는 팀제 도입 등을 이유로 정연주 사장에 반기를 든 상태였고, 이명박 정부는 정 사장을 끌어내리기 위해 갖은 모색을 하던 터였다.

그 압박이 김 이사장에게도 전달됐다. 그는 "그때 노조 아닌 직능단체인 기자협회장, 피디협회장, 기술협회장과 한 얘기가 밖으로 보도되어 난처한 처지에 몰렸고, 권력의 속살을 좀 아는 나로서는 앞으로 닥칠 사태에 대처할 자신이 없었지. 이명박 정권이 제도상 정연주 사장을 절대로 물러나게 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았어"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가 KBS를 나온 후 이명박 정권은 정연주 사장을 해임시켰다. 대통령에겐 법률상 KBS사장 해임권한이 없었다. 정 전 사장은 해임처분 무효청구소송을 냈고, 법원은 "해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김 이사장은 이 사건이 이명박 정권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했다.

"대통령 권한으로 해임을 했는데 그게 무효가 됐으면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지. 근데 눈도 깜짝하지 않아. 자기가 했던 행위 자체가 불법이라고 판결났는데도 떳떳한 거야. 이 정권은 그런 불법 상관 안 해. 그러니까 파쇼 냄새가 난다는 거야."

 김금수 이사장은 "한 달에 두 번이라도 정기적인 공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김금수 이사장은 "한 달에 두 번이라도 정기적인 공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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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정권 때 노사정위 위원장을 역임했다. "갑갑한 벽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라며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했는데.
"1996년 총파업도 민주노총이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 들어가서 '상급단체 복수노조 허용을 전원합의'로 이끌었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야. 정부가 그걸 뒤집은 거였으니까. 노사정위원회가 노동분야의 새로운 정책과 제도를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노무현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지. 그런데 노동계에서 정파갈등으로 '들러리만 선다', '사회적 합의주의'라고 논쟁을 벌이면서 노사정위원회 참가 결정을 하지 못했던 거지. 대의원 대회에서 신나까지 뿌리는 사태까지 나고.

그러면 원점으로 돌아가서 임금과 단체협약은 교섭에서 하더라도 정책과 제도는 어떻게 할 거냐고. 누구는 '직접 노정교섭을 하자'고 해. 노사정위야 법률상 기구니까 협의, 합의가 가능하지만 어느 정부가 노동조합과 직접교섭을 하려고 하냐고. 그렇지 않으면 총파업을 해야 하는데, 총파업은 산별체계가 공고한 유럽에서도 쉽지가 않아. 일개 지역이나 일개 산업 전체가 파업을 하는 건데 그게 쉽냐고. 그럼 민주노총은 정책과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 어떤 대안을 내놓을 거냐고? 앞으로는 임금이나 협약보다 더 중요할 텐데."

전날 학습모임에서 김금수 이사장은 참가자들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하자 그제야 그날의 학습내용을 정리해줬다. 그 내용 그대로가 현재 노동운동 후배들한테 하는 말 같았다.

"러다이트 운동이 기계파괴운동만은 아닌 게 기계가 들어오지도 않은 곳에선 왜 기계를 부쉈냐고?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던 거지. 현재도 러다이트운동이 가능한가? 결국 힘의 관계란 말이야. 독일 광산처럼 4시간만 일해도 되는 걸로 가려면 힘이 있어야 가능하지. 러다이트운동이 운동인지 봉기인지 구별할 필요가 없어요. 운동에는 타협도 있고 협의도 있고 폭동 등 여러 형태들이 있는 거니까. 그중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투쟁만이 오늘에 있어서도 의미를 얻을 수 있는 거지. 작은 투쟁이더라도 그 속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해.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은 정책기능도, 사회부조기능도, 대정치투쟁도 전부 어중간해.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뭐다'라는 전략목표가 없는 거지. 민주노총이든 한국노총이든 조직노선, 정책노선, 정치노선을 분명히 세우는 게 필요하다는 거예요." 

질문들에 거침없이 답하는 그는 천상 경상도 사나이였다. 나이 차 많이 나는 아내와의 일상에 대해 말할 때는 의외의 다정함이 배어나왔다.

"청소는 원래 내 담당이고, 된장찌개도 내가 끓인 게 더 맛있어. 정성이 들어가니까."

그의 된장찌개 비법을 받아적는 걸로 70여 년의 역사를 거슬러 온 인터뷰를 마감했다.

덧붙이는 글 | *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은 1937년 경남 밀양 출신으로 1960년대 통일운동을 했고 1972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을 시작으로 본격적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한국노총 연구위원 및 정책연구실장, 한국노동교육협회 대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민주노총 지도위원, 노사정위원장, KBS이사장,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다. 현재 노조간부 학습을 이끌고 있으며 내년 초 그가 집필한 <세계노동운동사>가 발간될 예정이다.

* 이 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11월호에도 실렸습니다.



#김금수#한국노동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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