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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서리에 여름내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우리를 번거롭게 했던 텃밭의 푸른 풀들이 갈색으로 시들었다. 뿌리에도 힘이 빠져 슬그머니 당겨도 뽑히고 만다. 비록 기다렸던 일이지만 풀죽은 모습은 애잔한 연민과 더불어 마음 한 켠을 쓸쓸하게 한다. 한 계절의 마감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한해의 마감이 가까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풀 죽는다.'는 몇 가지 다른 뉘앙스가 있다. 지금은 옷에 풀을 먹여 다림질하는 광경도 볼 수 없고, 풀 먹인 이불호청을 다듬잇돌에 놓고 다듬이 방망이로 리듬감 있게 두들기던 여인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무명베 옷에 풀 먹였던 그 시절, 풀을 먹인 빳빳한 옷, 고실고실한 이부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 어머니들이 흘렸던 땀은 사랑과 정성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빳빳한 풀기가 빠져 추레한 모습으로 변했던 것인데 그때에 사람들은 풀 죽었다고 표현했다. 또 예기치 못한 불행을 겪은 사람이 활기를 잃었을 경우에도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면서 풀죽었다는 말을 붙이기도 한다. 이 경우 풀 죽었다 함은 쓸쓸함 혹은 가여운 처지를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다. 

아무튼 풀 죽는다는 말은 일정한 시간이 흐른 결과라는 점에서 생기 있다거나 움이 튼다는 말과 정 반대의 의미를 담았다고 할 수 있으며 또 희망과 기대라는 말과도 배치되는 표현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벼를 벤 농촌에서는 황금물결 출렁이던 논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마른 콩대를 베어낸 밭도 휑한 느낌을 준다. 무와 배추를 심어 놓은 밭들만 푸르다.

야콘         야콘을 모아놓은 사진
▲ 야콘 야콘을 모아놓은 사진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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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야콘을 캤다. 사람을 부르기에는 양이 많지 않아 아내와 둘이서 작업을 했다. 그러나 멧돼지가 먹지 않아 외형은 온전하게 남았지만 땅위에 자란 것만으로 뿌리의 형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인가. 하룻밤 서리에 갈색으로 말라버린 줄기를 낫으로 쳐내는 동안 아내는 조심스럽게 뿌리를 덮은 흙을 긁어낸다. 여름의 기나긴 장마, 이후의 긴 가뭄…. 예상은 했지만 역시 작황은 기대 밖이다.

손수 모종을 만들고, 아내와 심고, 풀 메주고, 가지도 쳐 주고…. 사람의 노력이 자연앞에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다시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이번에는!" 하면서 매달렸지만 한 그루에서 최대 6kg까지 수확했던 몇 년 전의 기쁨은 다시 볼 수 없었다. 시장에 내다 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약 120kg 정도의 수확물 중에서 모양 좋고 크기가 알맞은 상품성 있는 것을 추려보니 40kg 정도밖에 안 된다. 현 시세로 환산한다면 고작 10여만 원쯤 될 것이다.

텃밭 농사 5년째. 갈수록 기후가 이상해짐을 피부로 느낀다. 마을 노인들도 최근 날씨가 이상하다고 입을 모은다. 우리 마을 사정인지는 모르나 금년 우리 마을은 되는 것이 없는 해라고 한다. 잘된 것은 고추뿐, 벼농사는 속으로 골병이요, 고구마도 실뿌리만 한 것만 많고, 생강도 밑이 안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만 특별히 잘 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정부에게 버림받고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사정이야 그렇다지만 하늘마저 외면하는가 싶으니 막막해지고 만다. 전국을 조망할 능력이 없기에 고작 사방 100리 이내의 농촌 현실만 보고 하는 말이 전체 농촌 현실을 대변하는 정확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불만을 반드시 전국적으로 공감해주는 사항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세상 돌아가는 꼴, 특히 농업분야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과연 내년에 새 풀이 돋아나듯 농촌은 살아날 수 있을까? 그리고 농촌이 죽어도 도시는 살아날 수 있으며, 나라는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한미 FTA 협상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정부의 발표대로 우리 농촌은 나아질까?

가을의 농촌. 서리에 풀만 죽은 것이 아니다. 체념에 익숙한 농민들의 마음은 더 시들어간다. 다가오는 겨울 그리고 내년 봄이 걱정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필통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야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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