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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흰 짐승이 바다로부터 솟아올라 축축하고 미세한 털로 뒤덮은 발을 성큼 성큼 내닫듯 안개는 그렇게 육지로 진군해왔다. 안개의 품에 빨려들어간 사물들은 이미 패색을 감지한 병사들처럼 미세한 수증기 알갱이에 윤곽을 내어주어 스스로를 흐리멍텅하게 만들어버렸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앞의 인용은 <도가니>에 묘사된 안개의 모습이다. 뒤의 것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묘사된 안개의 모습이다.

 

공지영은 안개의 모습을 흰 짐승으로 묘사하며 바다에서 육지로 진군해와 모든 것을 흐리멍텅하게 만드는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김승옥은 안개를 이승에 한이 있는 대상으로 묘사하며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은 존재로 이야기하고 있다.

 

두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근 50여 년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무진기행>이 1960년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이들의 허우적거림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도가니>는 2000년대 선으로 위장한 악의 모습을 안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진실을 덮어버리려는 우리들의 모습을 공지영은 소설 초반 안개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도가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난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의 책들을 부러 읽지 않은 경우가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일종의 '삐딱선'이다. 너도나도 모두 읽는 책 꼭 나도 읽어야 하나? 하는 일종의 삐딱함. 

 

그래서 2009년 이 작품이 책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오르내렸을 때도 읽지 않았다. 책을 읽지 않은 게 뭔 자랑이겠는가마는 성향이 뭐 그렇다는 거다.

 

이번 도가니 열풍이 불었을 때도 아이들하고 이야기나 나눠볼까 하고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읽고 난 후에도 대한민국은 온통 도가니 광풍에 여기저기서 요란한 소리들이 들끓었다.

 

영화로 시작된 도가니 열풍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무처럼 온 육지를 얽어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해무들은 서서히 걷히면서 세상은 조용해지고 있다. 세상이 조용해지려 하는 지금, 소설 속의 인물들이 안개비처럼 희끄무레하게 다가왔다.

 

듣지도 못하고 지능도 발달되지 않은 유리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교장, 행정실장, 그리고 교사에게 돌아가면서 성폭행을 당하는 모습. 한 번 할 때마다 1000원 씩 주며 씩 웃는 행정실장의 모습. 그리고 그 돈으로 과자를 사먹는 유리의 모습이 거대한 흰 짐승의 먹이가 되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또 지적장애 1급인 아버지와 청각장애와 지적장애를 가진 어머니를 둔 민수. 민수 또한 생활지도 교사 박보현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민수 동생인 영수 또한 성폭행을 당하고 열차사고로 사망한다. 그리고 또 하나, 연두. 이들 모두 선을 가장한 거대한 흰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무참히 짓밟히는 연약한 어린 짐승들이다.

 

그런데 거대한 흰 짐승들은 선의 탈을 쓰고 있다. 흔히 말하는 잘 나가는, 이름값 하는 인사들이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들이다. 말도 고상하다. 자애(慈愛)와 인화(人和). 그런데 이들은 자애(慈愛)와 인화(人和)의 탈을 쓰고 가장 추악한 짓을 서슴지 않고 행한다. 가장 약하고 약한 이들에게 거대한 이빨을 드러내고 선한 척한다. 그런데 이들의 이빨은 너무 강하다. 이들의 벽은 높고 단단하다. 너무 높고 단단하여 깨뜨리기가, 허물기가 무척 힘들다.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영화를 보았던 관객들은 아마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헌데 문제는 유리나 민수, 연두와 같은 아이들이 우리 사회에 숱하게 있다는 것이다. 어디 유리와 민수와 같은 어린 아이들뿐이겠는가.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라면 또 다른 형태의 유리가 되고 민수와 연두가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소설을 읽고 난 후 소설 속 인물들과 이런저런 생각들이 내내 맴돌았다. 알 수 없는 소리로 울부짖는 아이들의 소리, 진실을 파헤치고 보려고 하기 보단 감추기에 바쁜 어른들. 그리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눈물 나게 노력하는 이들. 그리고 이들을 모른 척 외면했던 우리들. 그러면서 어쩌면 우리들 마음속에도 또 다른 도가니가 똬리처럼 들어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들이 내내 뭍으로 밀려오는 안개처럼 달려들었다.

덧붙이는 글 | <도가니> / 공지영 / 창비 / 값10,000원


도가니 (100쇄 기념 특별개정판)

공지영 지음, 창비(2017)


태그:#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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