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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태정 시인 문단에서 또 하나 ‘고정희(1948~1991) 시인별’이라 불리던 그. 아, 그가 6일 이 세상을 버렸다
고 김태정 시인문단에서 또 하나 ‘고정희(1948~1991) 시인별’이라 불리던 그. 아, 그가 6일 이 세상을 버렸다 ⓒ 창비
물에 담근 가지가
그물, 파라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라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라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라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라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라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인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게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라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라스름 물올리며 잔잔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물푸레나무' 모두

지난 2004년 한국문단에 나온 지 13년 만에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펴낸 뒤 "시(詩)만 빼고 모두 버렸어요"라고 말하던 처녀시인 김태정. 문단에서 또 하나 '고정희(1948~1991) 시인별'이라 불리던 그. 아, 그가 6일 이 세상을 버렸다. 이 세상이 그를 버린 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이 세상을 버렸다.

나이 고작 마흔여덟에, 참으로 얄궂게도 고정희 시인 고향인 해남에서 말이다. 그는 첫 시집이 나오던 그해인 2004년에 땅끝마을이었던 전남 해남의 시골마을로 몸과 마음을 몽땅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라디오를 살가운 벗으로 삼아 작은 마당에 반찬거리인 채소를 일구며 시를 썼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나마 행복한 듯 보였다. 그런 그가 두 번째 시집도 내지 못하고 덜컥 '암'에 걸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그 길로 떠나버렸으니, 아 참으로 안타깝다. 김태정 시인! 착한 그대, 뒤돌아보지 말고 잘 가시게나. 그대가 남긴 시들이 있잖은가. 그 시들이 그대 실루엣이자 거듭남 아니겠는가.     

"시는 저를 숨 쉬게 하는 유일한 통로"

시인 김태정 첫 시집  그는 문단에 나온지 13년 만에 첫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펴냈다.
시인 김태정 첫 시집 그는 문단에 나온지 13년 만에 첫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펴냈다. ⓒ 창비
"마흔 해가 넘도록 깃들여 살아온 서울을 떠나 해남에 내려오기까지 스스로를 내몰지 않을 수 없었다. 낯선 곳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정 많은 사람들의 푸근한 심성 때문이리라. 뒤늦게 묶어내는 시집이라 부끄럽지만, 그래도 나눌 즐거움이 있다면 이곳 '정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 첫 시집 '시인의 말'

그는 지난 2004년 7월 끝자락, 13년 만에 낸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을 들고 "어차피 평생 시를 쓸 거니까요, 시밖에 가진 게 없으니까요"라며 "시는 저를 숨 쉬게 하는 유일한 통로"라고 말했던 때가 있었다. 이는 곧 그가 삶에서 시를 건지는 게 아니라 그가 쓰는 시에서 삶을 건진다는 뜻이다.

그가 남긴 유일한 시집을 잠깐 들춰보자. "개당 50원짜리 실밥 따기에 코피를 쏟으며"(시의 힘 욕의 힘) "학비벌이 부업으로 야간대학을 다녔고"(까치집),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색인 교정 아르바이트 일당 4만 원으로 장만한 286컴퓨터로 시를 쓴다"(나의 아나키스트). 그에게 "밥이 되고, 공과금이 되고, 월세"(궁핍이 나로 하여)를 마련해주는 것은 그림동화에 글을 쓰는 일뿐이었다. 

오늘은 조카가 선물해준 샤프로 시를 써보기로 한다
굵고 뭉툭한 연필심에 비하면
이 가늘고 날카로운 0.5밀리 샤프심은
가볍고 세련된 샤프의 자존심을 증거한다
아무리 정교한 세밀화라 해도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샤프심은
가끔 내 삶의 미세한 신경회로를 건드리지만
그 정도 사소한 경박성쯤은
애교로 봐줄 아량도 과시하면서

뒤꼭지만 눌러주면 무한정 심이 나오는
그의 놀라운 생산력은
몽당연필도 아쉬웠던 나의 어린시절을 조롱하는 듯도 하지만
샤프로 시를 쓰는 오늘만큼
내 손아귀에서 내 어깨에서 내 삶에서
짐짓 무게를 덜어내고자 한다 -'샤프로 쓰는 시' 몇 토막

김태정 시들은 "순정해서 말갛고 깊다"

김태정 시인보다 한 살 많은 이원규 시인(49)은 '땅끝 해남의 시인들'이란 글에서 "김남주·고정희 생가가 있는 삼산면 바로 인근의 송지면 미황사 아래 '순수' 그 자체의 시인이 살고 있으니 이 또한 눈물겹지 않을 수 없다"라며 그가 바로 "고정희 시인처럼 결혼하지 않고 살아온 김태정 시인(48)"이라고 적었다.

그는 "문단에 나온 지 13년 만에 겨우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낸 뒤 두 번째 시집은 또다시 감감무소식"이라며 "이 땅에 태어나 가장 죄를 적게 짓고 사는 시인이 있다면 7년 전에 달마산 아래 깃들여 사는 김태정 시인이다. 나 또한 지리산에 살며 '자발적 가난' 운운한 날들이 부끄러울 뿐"이라고 되돌아봤다.

"그녀는 지금 아프다. 많이 아프다. 지난 연말 암 판정을 받았지만 이미 늦었다. 얼마나 홀로 고통을 견뎌왔으면 이미 골수 깊숙이 암세포가 다 번지고 말았을까. 대학병원에서는 3개월 못 넘길 것이라고 선고했지만 김태정 시인은 지금 외딴 농가에서 홀로 견디고 있다.

'뭐 하러와. 그냥 조금 아프네. 난 괜찮아. 너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 하며 힘없이 웃는 그녀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지만, 차마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보일러기름이나 떨어지지 않았는지 둘러볼 뿐이었다. 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들에겐 죽음이 이토록 가까운 것일까. 아무래도 이들에 비해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 이원규

시인 정우영은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에 쓴 해설에서 김태정이 쓴 시들을 '민중서정시'라 이름 붙였다. "80년대의 억센 민중시가 구현하지 못한" 소담한 일상을 그린 김태정의 시들은 "순정해서 말갛고 깊"기 때문이다. 그는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생머리를 뒤로 묶은 그는 35도까지 치솟는 찜통더위에도 셔츠의 단추를 목 끝까지 여민 채 나타났다"며 "그의 시가 그 모습 위에 겹쳐졌다"고 되짚었다.

시인 김이하(52)는 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시인 김태정이 죽었다. 오늘 아침에 문자를 받았다. 너무나 안타깝다"라며 "죽기 전에 한번은 볼 수 있을까 했는데 눈을 감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글을 남겼다.

청매화차라니
나같이 멋없고 궁색한 사람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청매화차
무슨 유명한 다원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초의선사의 다도를 본뜬 것도 아닌

이른 봄 우이동 산기슭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래바람에 휘날리던 꽃잎 한 주먹 주워
아무렇게나 말려 만든 그 청매화차

한 사나흘 초봄 몸살을 앓다 일어나
오늘은 그 청매화차를 마셔보기로 한다
포슬포슬 멋대로 말라비틀어진 꽃잎에
아직 향기가 남아 있을까
첫 날갯짓을 하는 나비처럼
막 끓여온 물 속에서 화르르 퍼지는 꽃잎들
갈라지고 터진 입안 가득
오래 삭혀 말간 피 같은 향기 고여온다

누군가 내게 은밀히 보내는 타전 같기도 해
새삼 무언가 그리워져 잘근잘근
꽃잎 한점을 씹어보았을 뿐인데
입안 가득 고여오는 꽃잎의
은근하게도 씁쓸한 맛
꽃잎의 향기는 달콤하나
향기를 피워올리는 삶은 쓰거웁구나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 -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은 쓰다' 모두

고 김태정 시인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사상문예운동>에 시 '우수' 등 6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고인은 문단에 나온 지 13년 만인 2004년 7월 끝자락에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낸 뒤 해남 달마산 미황사 아래 한 농가에서 살다가 지난 해 끝자락 암 선고를 받고 투병하다 9월 6일 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은 해남 제일장례식장이며, 발인은 9월 8일이다. 연락처 061)537-4447


#김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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