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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언니는 직장에서도 인정을 받는 어엿한 숙녀이자 사회인이 되었고 오빠도 군대에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빠는 군대에 있으면서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제대를 앞둔 3일 전에 잠시 외출허가를 받아 서울에 있는 현대건설에 가서 입사시험을 치고 부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오빠가 제대를 한 얼마 후에 합격통지서를 받자 우리 집안에는 정말 경사가 난 것입니다.

그리고 언니는 월급을 타면 누런 봉지에 담긴 귤을 사오기도 했는데 그때는 귤이 정말 귀했기 때문에 우리는 갑자기 부자라도 된 느낌이었습니다  엄마가 월급을 타면 자장면을 먹은 것처럼 언니의 월급날은 신선한 과일 같은 것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언니가 엄마를 대신해 엄마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오빠가 군대에서 돌아오던 날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우연히 산동네 아랫길로 내려가 수학정석이라는 책을 사러가는데 멀리서 오빠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오빠-!"

오빠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나를 반기러 뛰어 왔습니다. 나는 오빠 품에 한껏 안겨서 기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추억이란 이런 것일까요? 내가 철우와의 크리스마스를 잊지 못하듯이 두 팔을 벌리고 함박웃음을 웃던 그 모습이 해가 지나고 지나도 잊히지 않고 내 머리 속에 너무도 기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내 고등학교의 입학은 곧 악몽이자 고통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원하던 고등학교인 창덕여고에 배정을 받았지만 내게 이렇게 고등학교 시절이 힘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창덕여고는 전통이 100년이나 되는 명문여고였고 우리 또래는 시험이 아닌 추첨으로 학교에 배정이 된 거의 첫 세대였습니다.

학교나 교복은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에는 여름이면 담쟁이 덩굴이 너울거렸고 학교 옆에는 윤보선 대통령의 집이 훤히 내려다 보였습니다. 그리고 껍질이 하얀 백송나무가 마당 한 쪽에 자리잡고 있었고 창문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닫는 형식의 일본식 같기도 하고 서구식 같기도 한 건물이었고 교복은 모자에 수선화 모양의 흰 카라가 정말 예뻤습니다. 이 카라는 따로 떼어내어 풀어 먹여 언제나 빳빳하게 해서 입는 것이 당시 우리들의 멋이었습니다.

 악몽의 입학재시험
 악몽의 입학재시험
ⓒ 장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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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들은 우리에게 겁이라도 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런 마음들이었는지 끄덕하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는 선배들하고 다르다. 선배들은 시험을 쳐서 이 학교에 들어왔지만 너희는 추첨을 받아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두 이 학교에 들어왔다. 열심히 공부해서 정말 창덕여고의 명문여고생이 되거나 계속 어중이 떠중이로 남는 것은 다름아닌 너희들의 몫이다."

그리고 곧 이어 연합고사 성적이 아닌 재시험을 치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나는 연합고사 성적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탓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잠시동안 임시반장을 하게 되었고 시험은 시작되었습니다.

눈앞이 캌캄했습니다 모든 과목이 주관식 과목이었습니다. 나는 시골학교는 아니었지만 거의 시골학교나 다름없는 곳에서 중학교를 나왔고 다른 아이들은 거의가 서울에 있는 아이들이어서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습니다. 시험방식이 달랐는지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주관식으로 시험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거의 백지를 내다시피 했습니다.

악몽은 곧 시작되었습니다. 성적이 나온 날 다짜고짜 담임선생님이 내 성적표를 내 얼굴을 후려갈기듯 내던지며 한마디 했습니다.

"평균 40점이 뭐야 40점이. 우리 반이 전교에서 꼴지다!"

담임선생님은 전교에서 우리 반이 꼴지라는 게 화가 났고 그게 모두 내 탓이라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눅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주눅은 3년 내내 이어졌고 급기야 큰 병과 자페증세로 이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스스로 왕따가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교과서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더욱더 문학서적 속으로 파고 들며 도피처로 삼았습니다. 언젠가는 교내 백일장을 했는데 시 부문에서 내가 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선생님은 '이깢게 무슨 상이냐'는 듯 상장을 내 얼굴쪽으로 또 후려치듯 내 던졌습니다. 이런 모습을 아이들은 고스란히 지켜 보았습니다. 상을 줄 때는 으레히 "학현이가 백일장에서 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모두 박수"이런 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의 태도는 평균 40점짜리가 별 꼴이야 하는 태도였습니다.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이상한 아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상한 나라에는 앨리스만 사는 게 아니고 이학현이란 아이도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이상한 나라로 빠져 든 것만 같았습니다.

게다가 나는 키가 작아 맨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게 되었는데 그것조차도 내게는 수치감과 열등감으로 작용했습니다. 뒤 줄에 큰 아이들은 앞 줄에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아가야 아가야"하며 놀리듯이 말하고는 했는데 나는 좀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했는지 내게는 그런식으로 부르는 큰 키의 아이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아마도 학과목 시간에도 교과서는 안보고 문학서적만 읽고 있는 나를 야단도 치고 벌을 세워도 나는 하라는대로 다 하면서 내 태도를 고수하자 나는 고집이 세고 선생님들도 어찌 할 수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왕따라고 해서 다른 아이들이 나를 괴롭히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주눅'이라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위안거리는 있었습니다. 큰 키를 지닌데다 반에서 늘 3등 안에 들만큼 공부를 잘하는 희수라는 아이가 나를 무척 좋아해서 나는 희수 덕분에 큰 키를 지닌 아이들과 별 무리 없이 제법 겉으로는 친하게 지내고 있었고 작은 키의 아이들은 이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희수에게 상처를 주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내 입학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늪 속으로 자꾸 빠져 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왜 스스로 그 늪 속에서 빠져 나올 생각을 못했는지 두고 두고 후회가 됩니다.

덧붙이는 글 |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악몽의 입학재시험#연재동화#최초의 거짓말#학현이#장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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