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시인 이봉형 이봉형 시인이 첫 시집 <어쩌다가 도둑이 되었나요>(푸른사상)를 펴냈다
시인 이봉형이봉형 시인이 첫 시집 <어쩌다가 도둑이 되었나요>(푸른사상)를 펴냈다 ⓒ 이종찬

개는 주인이 나서지 않는 한 외출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뭔가를 사러 가지 않는 한 외출하지 않습니다

원색의 놀이기구들, 공원
허리가 움푹 들어간 맥주캔 하나
화단 위에 누워 있습니다
쓰레기봉투 뚱뚱해져서
아무렇게 서 있습니다

샌들을 신은 하얀 아기가 배가 불룩한 할아버지와 산책 중입니다
막 걸음마를 배웠습니다
걷는 것도 신기하고 강아지는 더 신기합니다
강아지야 강아지야 다가옵니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댑니다

무엇 하나 오래 쳐다볼 것 없는 오후
아, 인생은 길고 휴일은 짧습니다

- '휴일' 모두

이맹물. 참 이름도 재미있다. 이 세상살이가 얼마나 흐리고 더러웠으면 이름까지 '이맹물'이라고 지었을까. 그가 살아가는 노동현장이 얼마나 알맹이 하나 없는 텅 빈 깡통같은 삶이었으면 '이 맹물', 그야말로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달콤하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아무런 맛이 없는 그런 맹물이 되었을까.      

'이맹물'은 제14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봉형 시인, 그 스스로 지은 필명이다. 그렇다면 '맹물'이 지닌 그 속내를 좀 더 깊숙이 찬찬하게 살펴보자. 이봉형 시인이 말하는 '맹물'은 그야말로 이도 저도 아닌 그런 물이 아니다. 천민자본주의에 포옥 빠진 이 세상을 보라. 겉만 반짝반짝 빛나지 그 속내엔 더러움만 가득 차 있지 않던가.

'맹물'은 '돈'이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그런 세상, 이것 저것 화학조미료를 마구 섞어 달콤한 맛을 낸 콜라나 사이다가 아니라 그냥 밍밍한 물일뿐이다. 맹물은 자연 그대로다. '순수' 그 자체라는 말이다. 여기서 '참'과 '거짓'이 드러난다. 맹물(가난한 사람)은 참이요, 콜라나 사이다(가진 사람)는 거짓이란 그 말이다. 이 사실만 알면 이봉형 첫 시집 <어쩌다가 도둑이 되었나요>에 담긴 그 속뜻을 반은 알 수 있다. 

묵정밭 같은 마음에 호미질하듯 시를 쓴다

이봉형 첫 시집 <어쩌다가 도둑이 되었나요> 이 시집은 노동현장과 그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생활현장에서 예리하게 갈고 닦은 ‘시의 칼날’을 이 세상을 향해 쌩! 하고 날린다.
이봉형 첫 시집 <어쩌다가 도둑이 되었나요>이 시집은 노동현장과 그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생활현장에서 예리하게 갈고 닦은 ‘시의 칼날’을 이 세상을 향해 쌩! 하고 날린다. ⓒ 푸른사상
"세계는 자신을 지속적으로 창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창조자가 아니라면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나는 시 쓰기를 통해 조금씩 깨치고 있다. 한때는 시를 야유하고 경멸했지만 이제는 시의 힘을 인정한다... 한 편의 시를 쓰고 나면 나는 다른 곳, 새로운 곳에 서 있곤 했는데, 그것은 '정신의 걸음'이 분명했다."
- '시인의 말' 몇 토막

필명을 '이맹물'이라 쓰고 있는 이봉형 시인이 첫 시집 <어쩌다가 도둑이 되었나요>(푸른사상)를 펴냈다. 이 시집은 노동현장과 그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생활현장에서 예리하게 갈고 닦은 '시의 칼날'을 이 세상을 향해 쌩! 하고 날린다. 말 그대로 신자유주의가 낳은 달콤한 물만 흐르는 것 같은 이 세상을 향해 '맹물'을 끼얹고 있는 것이다.

흉터, 얼룩, 광대, 남편에게 설거지 시키기, 조용한 일터, 나는 아내보다 힘이 세다, 휴일, 생수, 지하 데이트, 뿔을 달아다오, 가위와 바리깡, 나에겐 좋은 책이 많다, 퇴근길, 어금니, 늑대, 주인공, 노래를 찾다, 길가에서 어른들은, 젖꼭지, 이불 등 65편이 그것. 시인 이봉형은 '맹물 시'로 이 세상을 구석진 곳곳을 씻고 있다.

시인 이봉형은 '시인의 말'에서 "묵정밭 같은 마음에 호미질하듯 시 쓰기를 하던 중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시 쓰기가 이제 막 즐거워지려던 참에 시집이 나오니 기적이고 축복이다"라며 "이 시집을 위해 많은 나무들이 잘렸을 것이다. 얼굴은 모르지만 시집을 만드느라 많은 노동자들이 고생을 했을 것"이라고 마음을 꼭꼭 다진다.

이 세상은 '맹물'이 아니라 '잡탕물'

낳아준 아버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백수생활 청산하게끔 은혜를 베푸신 사장님도
저의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는 어쩌다 도둑이 되었나요
근래 회사에서 용역 사무실로 넘기는 돈이 이백만 원이 넘는데
나머지 백만 원은 어디로 가나요
혹시 불우이웃을 도우시나요 

- '아버지는 어쩌다 도둑이 되었나요' 몇 토막

이봉형 시인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맹물'이 아니라 '잡탕물'이다. 그 '잡탕물'이 흐르는 이 세상은 신자본주의로 넘쳐나는 엄청나게 큰 시장, 어머어마하게 큰 덩치를 자랑하는 공장, 밤낮 서로 눈치 보며 피터지게 싸워야 겨우 식의주를 채울 수 있는 전쟁터다. '돈' 앞에서 그야말로 아버지가 어쩌다 도둑이 되는 그런 세상 말이다.

"백수생활 청산하게끔 은혜를 베푸신 사장님도" 시인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도 식의주 때문이다. 시인은 그가 쓴 시 '흉터', '조용한 일터', '새 기계', '지갑', '가위와 바리깡', '퇴근길', '보석' 등을 통해 이 세상을 꼬나본다. 그가 바라보는 이 세상에서는 '더불어 삶'은 '나홀로 삶'으로 깡그리 무너지고 '자본의 뿌리'인 노동이 짓밟히고 있다.

사상, 지식 등 모든 가치를 가로막고 있는 '돈' 때문에 수많은 생명들이 악악! 소리치며 죽어가고 있다. 이 세상이 이러한데도 사람들은 신자본주의 여기저기에 낀 부속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다. 시인은 "아내는 어쩌자고 저렇게 많은 옷들을 산 것일까"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그도 마찬가지다. 그 또한 "청소기를 네 대나 산 것"(목소리들)이기 때문이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맹문재는 "이봉형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두 가지의 특징을 심화시키고 있다. 한 가지는 작품의 제재들이 마이크로칩 공장을 넘어 아내를 비롯한 가족과 이웃에까지 확대했다는 점이며, 다른 한 가지는 제재들에 대한 거리 조정을 이루었다는 점"이라며 "비정규직과 파견법과 스트레스와 만성질환과 독촉장을 받는 노동자들의 삶을 관념에 치우치지 않고 그려낸 것"이라고 평했다.

시인 이봉형은 1977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2005년 '이맹물'이란 이름으로 제14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다음은 시인 이봉형과 전화로 나눈 짤막한 일문 일답이다.

- 시집 제목이 독특하다. 왜 이렇게 지었나?
"전태일문학상 수상작 제목이다. '어쩌다가 도둑이 되었나요'는 반어적인 질문인데 '질문하기'는 제 시론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 세상은 지금 거꾸로 흐르고 있다. 그 때문에 반어를 통해하면 이 세상이 제대로 보일 수 있을 거 아니겠는가."

- 맹문재 시인은 '노동시'라고 했다. 노동시와 다른 시가 지닌 차이는?
"노동자가 썼으니 노동시 아닌가. 다수의 시인들이 뭔 소린지도 모를 시를 쓴다. 읽는 이가 모르는 시는 쓴 이도 모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시는 잘난 체를 위해 쓰였거나 자위를 위해 쓰인다. 그런 시는 주술적 힘을 주기도 하는데 자칫 '마약'이 될 수도 있다."

- 이번 시집에서 무엇을 강조했나?
"노동, 생명, 공동체, 자본주의, 시장, 공장, 계급, 혁명…. 이런 것들이다. 개인 차원의 성숙과 사회적 차원의 운동이 만나는 지점이 있을 거다. 뭔가가 가능하려면 거기에서 가능할 거다. 애매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시대다."

- 어떤 시인을 좋아하는가?
"시를 많이 읽어보지 못했다. 앞으로는 열심히 읽으려고 한다. 어쨌든 지금은 윤동주, 백석, 김수영, 맹문재가 생각난다."


어쩌다가 도둑이 되었나요

이봉형 지음, 푸른사상(2010)


#이봉형 시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