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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로지 전화 송수신기능과 문자메시지 기능만 착실히 수행하는 내 휴대폰, 때때로 시계기능과 알람기능으로 기쁨을 주기도 한다.
오로지 전화 송수신기능과 문자메시지 기능만 착실히 수행하는 내 휴대폰, 때때로 시계기능과 알람기능으로 기쁨을 주기도 한다. ⓒ 김학용
내 휴대폰 번호는 011-6OO-6OOO다. 큼지막한 터치 화면에 손가락만 살짝 눌러도 인터넷까지 연결되는 똑똑한 스마트폰의 첨단 기능도, 이 번호로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하지만 17년 이상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이 번호는 이제는 내 이름 석 자로 통하는 나만의 무형자산이다.

폼잡던 자부심 번호, 이젠 '아집'의 상징

간간히 "어? 혹시 전화했는데, 아직도 번호가 그대로네? 햐…. 잘 지내지? 나야~!" 라고 걸려오는 친구의 몇 년 만의 반가운 전화는 01X만이 느낄 수 있는 작은 특권이리라.

한때는 통신사의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세상, O월드'라는 귀족 마케팅에 편승하여 오로지 '폼' 잡으려고 011 번호를 고집한 적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한 번 받은 011 번호를 끝까지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지조와 절개의 자부심인양 여긴 적이 있었다.

물론 한 번씩 내 고물 전화기가 말썽을 부리며 "그동안 충분히 어리석으셨습니다. 이젠 스마트 폰으로 넘어갈 때가 아닌가요?"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한민국 가전사의 AS는 믿을 만한 수준이라 걱정없다.

하지만 011을 비롯한 2G 번호는 이젠 '아집'의 상징으로 굳어져가는 추세다. 010은 더 이상 정체불명의 영업용 번호나 양아치 번호가 아닌 대한민국 모바일통신의 표준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심지어 최신 스마트폰에 PC보다 더 폼 나는 탭이나 패드까지 얹어주며 공짜로 2년 동안 사용하고 그때 가서 010으로 바꾸어도 된다고 꼬드긴다.

아, 이런 유혹의 손길에서 내 번호 011을 지킨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껏 잘 지내왔는데 강제로 바뀐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다.

번호 고수하기 위한 눈물나는 노력들을 아는가? 

SK 871만 명, LG 915만 명, KT 81만 명 2G 이용자들이여! 우리가 기존 번호 유지하기 위해서 들인 마음고생이 얼마란 말인가? 굳이 재산권, 인격권, 행복추구권, 개인정보자기결정권, 평등권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동안의 마음고생과 휴대폰 교체 비용으로 그따위 최신 스마트폰 몇 개를 사고도 남았다. 오직 한길만을 고집했던 2G 이용자들의 눈물나는 분투기를 3G 이용자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다고 010 통합을 무턱대고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번호통합의 취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강제성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010 사용자가 일정 비율의 목표수준까지 늘어나면 나머지 2G 사용자는 강제로 번호를 반납하고 010으로 통합 당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또 3G와 스마트폰 가입을 희망하는 사람은 무조건 울며 겨자 먹기로 010으로 이동을 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번호통합을 틈타 모든 휴대폰을 스마트폰으로 획일화하려는 이통사의 '검은 손'이다. 기존 2G서비스로는 음성통화와 일부 부가서비스에 문자메시지 요금만 받던 것을, 스마트폰은 선택의 여지없이 인터넷과 결합된 기본 서비스에 요금제를 적용하여 몇 배의 요금을 챙길 수 있다. 그들에게 번호는 돈벌이 수단의 일부일 뿐이지, 강제성이 되든 말든 그런 건 결코 알 바가 아닌 것이다.

다행히 KT의 2G서비스에 대한 6월 말 종료 시도가 결국 무산됐다. 방통위가 KT 2G 서비스에 대하여 5월 말 현재 81만 명이나 남아 있고 이용자 통지기간이 지난 3월 28일부터 3개월에 불과해 6월 말 종료는 무리라고 결정한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강제통합에 따른 소비자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통합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관련기사 :  KT 2G 중단 물 건너가... "이용자 더 줄어야" )

최악의 정책은 소비자에게 불이익을 강제하는 정책이다. 모바일 서비스는 번호를 통해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관리하기 때문에 인적 네트워크 유지와 구축에 번호를 활용했다는 의미에서 '자산'이라는 가치도 함께 지닌다. 따라서 국가가 정책을 통해 소비자의 자산인 번호변경을 강제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것은 소비자의 사적 자산의 포기를 사실상 강제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소비자의 사적 권리 인정하고 배려해야

집값이 상상을 초월하는 타워O리스, 래O안, 쉐O빌 등은 이미 부의 상징이 됐다. 이와 관련된 우스갯이야기가 하나 있다. 롯O, 삼O, 현O 등으로 짧고 단순했던 아파트 이름이 갑자기 영어까지 넣어서 복잡하고 길어진 이유가 시어머니가 며느리 집을 찾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거다.

팔순 노모가 아들 목소리 한 번 듣고 싶다면, 단축번호 길게 한 번 누르면 바로 통화가 됐다. 전화번호 기억 못해도 큰 아들은 1번 길게 누르고, 둘째 며느리는 2번 길게 누르고…. 이 분들에게 3G서비스에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와 어플리케이션 다운로드 등 첨단 스마트폰 기능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 분들, 요금은 조금 부담하더라도 그냥 기존 번호를 사용하게 해 주기만 바랄 뿐이다. 2G폰이지만 전화로 자식들 목소리나 들으면 그걸로 족하다. 기업이 이것으로 설령 손해가 난다 해도 기업 또한 사회에 공헌할 최소한의 의무는 있다는 걸 아는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화 못 걸게 하려는 이유가 아니라면, 소비자의 권리도 배려하는 정책을 주문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강제통합이 아닌, 원하지 않으면 기존 번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이거 하나다. 2G에서 3G로 옮길 경우 혹은 3G 신규 가입할 때만 010번호를 부여하라는 것이다.

내가 시대흐름과 유행에 뒤떨어진 낙오자인가? 아니면, 남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바보인가? 아직도 전화번호 물어보는 사람마다 깜짝 놀라지만, 이 번호가 내 신용이고 얼굴이라 생각하니 앞으로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어디 한번, 최후의 1인 마지막 011 이용자가 되어 보련다. 그런데, 단말기가 다 되어 가니 큰소리치던 내가 한없이 작아 보인다. 선택의 폭도 좁고 할부금까지 부담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다. 공짜 스마트폰, 부러우면 지는 건데도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나보다.


#010#번호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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