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시인 안도현 "시에 공식이 있고, 정해진 소재가 있습니까?"
▲ 시인 안도현 "시에 공식이 있고, 정해진 소재가 있습니까?"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지난 6월 2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전지부가 조합원 자율 연수의 일환으로 시인 안도현을 초청해 '시와 창의성'이란 주제로 특강을 펼쳤다. 교사, 학생 등 약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 시인은 과거 교직 시절 일화와 시창작 과정을 곁들여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내 청중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과 함께 배운 시는 잊어라. 대신에 그 시인의 다른 작품 10편을 찾아 읽어라. 시를 공부하듯이 대하지 말고 무조건 많이 그냥 읽어라. 비유, 은유, 상징, 내포적 의미 따위에 연연하지 말라. 대충 읽어도 좋다. 무조건 많이 읽어라. 그것이 시랑 친해지는 법이다."

강의실 앞쪽에 앉은 고교생들을 의식한 듯 안 시인은 시에 공식이 있거나 정해진 소재가 없음을 강조하며 무조건 많이 읽고 쓰라고 강조한다.

시를 쓰고 읽는 궁극적 목표는 창의성 계발이라고 본다는 안 시인은 "창의성 교육이 교육 정책에만 있고, 실제 프로그램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수사법, 비유, 상징 등에 연연하다 보니 제대로 시 감상이 안 되고 창의적 사고를 방해하는 느낌이 든다"며 '시와 창의성'을 주제로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며 강의를 이어갔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말은 무엇일까요? 안 시인이 청중을 향해 묻는다. '낙엽, 단풍, 코스모스, 귀뚜라미, 황금들녘' 등 다양한 대답을 유도해 낸 안 시인은 "시에 공식이 있고, 정해진 소재가 있습니까?"라고 되물으며, "그러한 것들이 가을을 구성하는 중요한 소재이긴 하지만, 나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나만의 작품을 쓸 수 없다"며 창의성을 강조한다.

다음 괄호 안에 들어갈 의태어나 의성어는 무엇일까?

토끼는 (       ) 걷는다, 매미는 (       ) 운다, 귀뚜라미는 (        ) 운다.

당연히 '깡충깡충', '맴맴', '귀뚤귀뚤'이 정답이다. 바로 이게 어른에게 아이들이 주입받은 고정관념이라는 것인데, 토끼가 (엉금엉금) 걷고, 매미는 (여름여름여름) 울고, 귀뚜라미는 (가을가을가을) 운다고 표현하면 안 되는 것이냐며 안 시인은 개념적 사고를 경계했다.

이어서 안 시인은 초등학생이 쓴 동시 '내 자지'와 '엄마의 런닝구', 복효근 시인이 쓴 '목련꽃 브라자'를 예로 들어 시어가 지닌 순수성을 강조하고, 학교 현장에서 주제를 판서하며 고정관념화하는 오류를 지적했다.

시인 안도현 "내가 너를 보고 싶어 하니까 지금 첫눈이 내리고 있어!"
▲ 시인 안도현 "내가 너를 보고 싶어 하니까 지금 첫눈이 내리고 있어!"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안도현 시인은 "창의성이란 미국의 교육 심리학자 토랜서(Torrance)가 지적한 대로, '더 깊게 파고, 두 번 보고, 실수를 감수하고, 고양이에게 말을 걸어 보고, 깊은 물 속에 들어가고, 잠긴 문 밖으로 나오고, 태양에 플러그를 꽂는 것"이라며, "공동체를 강조하면서 아이들을 획일화하는 건 아닌지, 늘 같은 것보다는 다른 것을 강조하고 다른 것이 있을 때는 인정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엄마! 오목하게 생기고, 조각배처럼 생기고, 헝겊으로 된 거 있잖아요. 걔가 우리를 멀리까지 데려다 주기도 해요. 이거 사줘요'라는 말과 '엄마! 신발 사줘요'라는 말은 차원이 다르다. 전자의 경우를 '개념해체적 대화'라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창의성을 기르는 데 아주 유용하다는 것이 안 시인의 생각이다.

덧붙이자면 '엄마! 수박 사줘요'라는 말보다 '엄마! 속이 빨갛고 까만 씨가 있는 둥그런 과일을 사줘요'라는 말이 훨씬 창의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안 시인은 "명색이 시인으로서 남들이 흔히 쓰는 '사랑한다'는 말을 아내에게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자, 객석에서 "그럼 뭐라고 합니까?"라고 묻는다. "그걸 꼭 말로 해야 합니까?"라는 안 시인의 대답에 청중의 웃음꽃이 만발한다.

시인 안도현 "고정관념, 개념적 사고를 경계해야 합니다."
▲ 시인 안도현 "고정관념, 개념적 사고를 경계해야 합니다."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안 시인의 개그 같은 창의성 강조가 이어진다. 결혼할 때 좋은 남자 구별법이 있다고 한다. 프러포즈라는 게 평생 한 번뿐인데, 숨겨진 의미도 없이 어설프게 하는 남자는 좋은 남자가 아닐 거라는 게 안 시인의 조언이다. 예를 들어본다.

"영자야, 사랑해! 우리 결혼하자!"

이런 프러포즈를 하는 남자랑은 절대 결혼을 하지 말라! 평생 한 번뿐인데 이토록 비시적, 비창의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자기만의 문장을 찾아라! 이런 건 어떤가?

"나는 아침마다 너의 뒤에서 쌀 씻는 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청중, 감동의 웃음이 출렁인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 중에 머리를 꽝 칠만한 것이 창의적인 것이라는 안 시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백석이다. 그래서 그의 시작품 속에서 시집 제목을 따기도 했다. '모닥불', '외롭고 높고 쓸쓸한' 같은 시집이 그 예다"라며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창의성을 강조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첫눈이 오는 날 우리는 '첫눈이 내리니까 네가 보고 싶다'라고 흔히 말하지만, 기왕이면 '내가 너를 보고 싶어 하니까 지금 첫눈이 내리고 있어'라고 절묘한 역발상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 안 시인의 주장이다(청중들의 공감대가 강의실 안에 빽빽하다).

시인 고은의 초기시 중에 '사치'라는 시가 있다. 이 시 속에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또한 '가을이 와서 누님이 아름답다'는 말보다 훨씬 빼어난 역발상의 감동이라는 것이 안 시인의 판단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전문

중고교 시절부터 시 쓰기를 시작하여 현재 약 천여 편의 작품을 썼다는 안 시인에게 '연탄 시인'이라는 타이틀은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자신의 시에 '나무', '풀잎' 같은 시어가 '연탄'이라는 시어보다 훨씬 많다는 안 시인은 천여 편의 작품 속에 '연탄'이란 시어는 4~5편 정도에 쓰였을 만큼 미미하다며, 어느 순간 '연탄 시인'이 되어 의아하다는 느낌을 전했다.

시인 안도현 "학생 여러분! 무조건 많이 읽고 쓰기 바랍니다."
▲ 시인 안도현 "학생 여러분! 무조건 많이 읽고 쓰기 바랍니다."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작품 '너에게 묻는다'가 결코 좋은 시는 아니라고 본다는 안 시인은, '너에게 묻는다'가 어느 드라마 대화에 인용되면서 단 하룻만에 500~1000권 정도 시집이 판매된 적도 있다며 그 시가 경제적으로 상당한 도움을 준 시임에는 틀림없다며 색다른 웃음을 선사했다. 

강의 끝 무렵 안 시인은 과거 이리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당시 27세 청년교사)에 썼던 장문의 시 한편을 낭송했다.

이리 중학교 / 안도현

어느 때 묻지 않은 손이 닦아놓았나
유리창을 열면

군산선 화물열차가
바다에서 돌아오는 곳
운동장 앞으로는 목포 여수 서울로
호남선과 전라선이 달리는 곳
짓궂은 아이들이 그래서 기차길 옆 오막살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리중학교, 꼭두새벽 도시락 싸서
나는 낡은 외투를 입고 출근하고
아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데리고 등교한다

우리나라 모든 학교가 그러하듯이
월요일 아침이면 애국조회가 열리고
펄럭이는 태극기 아래
아무것도 모르는 가슴에 손을 대는
일제 치하 어린 학동 교장선생님이 그러하였듯이
분단 나라 젊은 국군 담임선생님이 그러하였듯이
측백나무처럼 오와 열을 맞추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코끝이 맵고 발이 시린 겨울

이리중학교에서
누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나
일주일에 스물네 시간 국정 국어교과서를 가르치는
한 달에 스무 시간 보충수업을 하는
조회 종례 때마다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수업료 보훈성금 방위성금 불우이웃돕기성금
극기훈련비 수학여행비 졸업앨범비
날이면 날마다 독촉을 하는
명찰 배지 실내화 두발검사를 하는
성적이 떨어지면 매를 들고 때리는
나를 아이들은 선생님, 하고 부른다
나는 분필밥 겨우 2년 먹었는데
나는 봉급날을 기다리는 가난한 월급쟁이인데
나는 넥타이도 제대로 맬 줄 모르는데
나는 배고픈 아이 라면 한번 못 사주었는데

이 유리창을 닦으며
모르는 사이에 하늘을 닦던 아이들 중에
먼 바다에 배 타고 고기 잡으러 간 아이는,
소작 얻은 황토밭에서 배추 뽑고 있는 아이는,
이리역 화약폭발 사고 때 하늘로 떠난 아이는,
그때 살아 남아 교문 앞을 손수레 끌고 바삐 지나는 아이는,
대학생이 되었다가 감옥에 간 아이는,
귀금속공장에서 하얗게 밤새는 재작년의 아이는,
추억의 동창회가 열려도 돌아올 줄 모르고
그 옛날 총각선생님 머리 위에는
눈이 내렸다
그 옛날 졸업한 아이가 출세하는 동안
해진 출석부 끼고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버드나무들이 톡톡 손가락 꺾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러면 봄은 또 멀지 않으리라 믿으면서

그날 평교사를 위한 시를 쓰고 싶었다
겉보리라 불리던 김경희 수학선생님이
책상 속을 정리하고
40여년 교직생활을 그 서랍을 닫고
홀로 뒷모습을 보여주며 떠나시던 날
나는 숙직실 수돗가에서 얼굴을 씻고
까닭없이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참았다

이리중학교야
나도 저 무명의 찬란한 길을 가리라
점심시간이면 김치 냄새가 우리를 적시는 교실에서,
손목과 발목이 굵어지는 운동장에서,
추운 아침에 서로 뿜어주는 입김 속에서,
모이면 횃불이 될 아이들의 수많은 눈빛 속에서,
이 뜨거운 조국의 한복판에서,
이리중학교에서.

이리중학교 재직시절 회식 자리에서 교사 안도현이 이 시를 낭송했을 때, 연세 드신 선생님들이 교육 현실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렸고, 당시 동아일보 '시월평'에 큼지막하게 소개되면서 이리중학교는 물론 시인 안도현의 면모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위기가 찾아왔다. 안도현의 역작 <이리중학교>는 '교육현장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시'라는 상부기관(당시 문교부)의 지적을 받아 이 시를 쓰게 된 경위서와 다른 문예지에 싣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도록 강요받아야 했던 것.

각서를 절대 쓰지 않았던 안 시인은 하루 세 차례씩 교장실에 불려 다녀야 했고, 도교육청으로부터 지속적인 압력을 받아야 했다. 때는 1987년 6월 29일! 당시 도교육청에 불려 다니며 각서를 쓸 것을 강요받던 이리중학교 교감이 "며칠 사이에 있었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며 안도현 시인의 손을 잡았다고 한다. (청중 박수!)

나라 전체가 민주화 바람이 불 즈음 "결국 노태우 덕을 보았다"며 웃음 짓던 안 시인은, "당시 각서를 쓰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는 동안 성장을 많이 했다. 더 강해졌다. 시가 나보다 더 진보적이어서 해직되었다"며 마무리 웃음을 선사했다.

시인 안도현 "만나서 반갑습니다."
▲ 시인 안도현 "만나서 반갑습니다."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이어 안 시인은 습작기 고교생들에게 '먹는 게 바뀌면 똥이 다르다'며 젊은 시인들의 시작품을 많이 읽을 것을 권장하고, 창작과 비평사가 청중들에게 배부한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에 사인을 하는 것으로 특강을 마무리했다.


#안도현#안도현 시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