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스승의 날'이 있는 5월이라 그런지 찬란하게 빛나던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영화가 극장가의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은 영화 <써니>의 한 장면.
'스승의 날'이 있는 5월이라 그런지 찬란하게 빛나던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영화가 극장가의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은 영화 <써니>의 한 장면. ⓒ CJ E&M Pictures

"선생님, 금요일에 뭐하세요?"
"금요일? 나 지금 있는 학교 체육대회 해."
"저녁때 약속 없으세요?"
"응. 별일 없어."
"우리 학교는 그날 소풍 가서 야자 안 해요. 스승의 날인데 선생님 뵈러 가도 돼요?"
"응. 와라."

내가 1학년 때 담임을 했던 아이들이 고3이 된 올해에도 찾아왔다. 정성스럽게 만든 카드와 얼마 되지도 않을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산 케이크를 들고서. 학창시절 특별히 가슴에 담아둔 선생님이 없어서 은사를 찾아뵌 경험이 별로 없기에, 나를 찾아와 주는 제자들이 그저 고맙고 신기하기만 하다.

교복을 입고 찾아온 아이들과 피자를 먹으러 갔다. 얼마 전 치른 중간고사 이야기,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이야기, 지금 담임 선생님 이야기 등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어서일까? 올해 열아홉 살인 이 아이들이 그지없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내년에는 대학에 진학해서 미니스커트에 킬힐을 신고 오겠다며 헤어졌다. 그때는 맥주를 한잔하기로 했다.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작품성은 인정받았지만 노출 수위가 상당히 높은 영화 한 편과 일본 코미디 영화 한 편 사이에서 잠시 고민을 했다. 그때 건전한 일본 코미디 영화를 골랐던 것은 곧 극장에서 내릴 예정이라 그날이 아니면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표를 사서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데, 표를 받는 예쁜 아가씨가 나를 보더니 "어머, 선생님!" 하며 반가워했다. 몇 년 전 내게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었다. 이제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 이 극장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건전한 영화표를 내밀 수 있었던 이 선택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보고 싶었던 야한 영화는 그 다음번에, 역시 혼자 가서 결국 보고 말았다.

교사 17년 차, 곳곳에 포진해 있는 내 제자들

혼자서 스테이크 전문점에 갔다. 포장해 가지고 가기 위해서였다. 그 곳에서도 알바를 하고 있는 제자를 만났다. 제자는 빵이 맛있더라는 내 말 한마디에 그 빵을 잔뜩 넣어주었다. 동료들과 술을 마시러 간 곳에서 알바를 하는 졸업생을 만난 건 셀 수도 없다.

한 번은 학교와는 멀리 떨어진 압구정동에서 밥먹으러 식당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제자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 먼 곳에서도, 내가 담임을 했던 예쁘고 사랑스러운 제자를 만났다. 하긴 먼 곳에서 제자를 만난 것이 국내에서 뿐만은 아니다. 인도의 아그라에 있는 타지마할에 가서도 제자를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사인 나는 영화를 봐도 항상 건전하고 작품성 있는 것만 봐야 하고, 술은 아무리 마셔도 결코 취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며, 어느 곳을 가든 항상 합법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만 동행해야 할 것 같다.

수업 시간마다 잠을 자서 많이 싸웠던 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 학생이 졸업한 후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만난 적이 있었다. 근처 뷔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는 그 애는 그곳 제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며 걸어가고 있었다. 나를 본 순간 그 아이는 당장 담배를 끄고 내게 인사를 했다.

학교에서는 싸우기만 했던 사이지만 밖에서 만나니 반가웠다. 과연 나를 선생으로 취급이나 할까 싶었는데, 졸업한 그 아이는 아주 예의 바르게 대해 주었다. 너도 이제는 사회인이니 담배 피워도 되는데 왜 껐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 앞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했다. 몇 년간 그 아이와 다투며 쌓였던 감정이 한순간에 녹아버렸다. 어린 시절 재미없는 내 수업을 들으며 잠이 들었으면 어떠리. 이제는 반듯한 사회인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지하철역에서 부드러운 인상의 잘 생긴 청년 하나를 만났다. 내가 담임했던 십년 전 그 아이는 조금은 암울해 보이는 표정에 약간 무뚝뚝했었다. 그런데 십 년이 흐른 후 그 아이는 부드러운 미소에 다정한 성격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며칠 후 그 아이와 술 한잔을 했다. 이제는 대학 졸업반이 된 그 아이의 학교, 연애, 미래 계획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며 한없이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이제는 그 아이를 떠올릴 때, 마음에 걸리던 암울한 표정 대신, 나를 우연히 다시 만난 순간 보여준, 환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스치듯 만난 제자들, 신이 내게 준 선물

 사진은 영화 <써니>의 한장면
사진은 영화 <써니>의 한장면 ⓒ CJ E&M Pictures

세상을 살아가며 개인적으로 힘들고 스트레스가 쌓일 때쯤이면 신기하게도 길거리에서, 버스에서, 지하철역에서 스치듯 제자를 만난다. 아이를 만나 반가워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얼마 전까지 내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고민이 말끔하게 날아가고 새로운 희망이 생긴다. 내 아이를 바라보며 힘을 얻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그럴 때마다 운명이, 혹은 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 아닐까 싶어진다. 딱 힘든 순간에 절묘하게 제자를 보여주시어 어려운 이 순간을 헤쳐나갈 힘을 주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동호회 사람들과 술 한잔을 할 때였다. 어떤 분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고등학교 교사인 나를 보니 예전 담임 선생님이 생각난다고. 고등학생 때 담임 선생님 속을 하도 썩여서 지금도 가끔 생각하는데 너무 미안해서 찾아뵙지 못한다고…. 공부 안 하고 말썽만 부렸다는 그분은, 세월이 흐른 지금 직장도 다니고 결혼도 해서 아주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분께 말씀드렸다. 그렇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 꼭 그 선생님을 찾아가 보라고. 옛날에 속을 썩였던 제자가 이제는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주 기뻐하실 거라고. 이건 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권고였다.

혹시 미안해서 찾아뵙지 못하는 선생님이 있는가? 그렇다면 꼭 한 번 찾아뵙기를 권한다. 선생님의 속을 많이 뒤집어 놓아서 미안하다고 느끼는 제자일수록 더더욱 그래 주었으면 한다.

나를 힘들게 했던, 하지만 이제는 당당한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그때 내 고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교사에게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나도 앞으로 십년 후를 기대해 본다. 재작년, 내 가슴에 아련함을 남긴 그 아이가 부디 행복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 줄 십 년 후 말이다.


#스승의 날#제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