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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무조건 지겹고 하기 싫다. 회의를 위한 회의가 거듭되면 심각한 회의(懷疑)에 빠지고 만다. 특별한 아이디어도 없는데 회의에 불려나가 앉아 있으면 거의 뇌 고문을 당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렇듯 괴로운 회의에도 예외가 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다. 회의하는 자들에 의해 지겨운 회의는 얼마든지 작은 광장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명색이 여성교육을 기획하는 시민단체의 회의여서 참석한 이들은 올해 두 번 의무적으로 강좌 또는 집담회의 안건을 확정해야 했다. 기획회의는 모름지기 기업이나 단체를 막론하고 전체를 움직이는 동력, 즉 에너지를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정체성과 비전을 제시해야 하고, 시의적절한 담론을 버무려 일 년치 먹을 정신적 양식을 마련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을 지닌다. 그러나 고육지책을 짜내어도 대중의 관심은 늘 현실과 일상에 집중되어 있어 홀대당하기 일쑤이다. 어떻게 하면 주부들이 밥 한 끼 덜 챙기고, 물 묻은 손을 닦으며 뛰어나올 좋은 강좌를 만들 것인가, 실로 어려운 주제였다.

어려운 주제를 놓고 회의하던 여자들이 어느 순간 회의인 듯, 수다인 듯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더니 곁길로 빠지는 여행(완전히 주제에서 이탈하기)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여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샛길로 빠져나가기가 제일 신나고 좋지만, 이것이 단점이 되어 뭇 남성들로부터 맹공을 당하기도 한다. 한 번 풀린 여자들의 말(言)고삐는 웬만해선 강압적으로 틀어쥐기 어렵다. 그들 스스로 달리던 발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해서 저마다 주제에서 벗어난 잡담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원탁의 탁자에 일품요리를 얹고 돌려가며 집어먹는 중국요리처럼 한 치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다양하고 풍부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나누어 먹던 일품요리는 꽤나 거창하고 묵직한 '페미니스트와 자녀교육의 딜레마'였다. 거대담론과 현실의 불꽃 튀는 논쟁거리로 충분한 주제였지만 참석자들은 진지하되 무겁지 않고, 솔직하되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세련된 화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A는 '사교육 절대 안 시키고 내버려뒀더니 서울대 갔다' '자유롭게 방목했더니 자기 스스로 앞길 헤쳐 나가는 독립적인 아이로 자라났다'는 성공담에 절대로 속지말자고 했다. 차라리 '내놓고 키웠더니 완전 싸가지 없는 자식 되더라' 혹은 '존중해서 키웠더니 손 하나 까닥 않는 기생충 되더라'는 고백이 더 가슴에 와 닿았다고 해서 모두를 무장해제 시켜놨다. 평범을 가장하고 뒤에서는 재력과 실력을 총동원하여 특훈을 시키는 무서운 엄마들, 속칭 잘 나가는 슈퍼맘 때문에 더 큰 상처와 좌절을 경험하는 진짜 평범한 엄마들의 대변이었다.

B는 나름 올곧은 교육관을 갖고 공동육아 활동을 열심히 해온 의식 있는 엄마였다. 이제 곧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이가 '엄마도 대안학교 선생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서 지금부터 공부해도 십 년을 걸릴 일이라고 은근히 불가능성을 시사했는데, 아이가 '괜찮아, 십년 뒤엔 나도 대안학교 가 있을 테니까 그때 거기에서 만나면 되겠네'라며 너무나 천진하게 답하더란다. 결국 아이의 엄마는 '나는 공부하는 게 너무 싫다'고 속내를 드러내며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고.

B는 아이의 소망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것보다 더욱 절망스러운 현실, '비생산적 자아'에 눈뜨면서 차라리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관과 헌신적인 육아에 전념해도 어느 날 문득 남편이 던진 한 마디, '네가 집에서 한 일이 뭐있어? 내조나 잘해라'가 비수로 와 꽂혔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서 원대한 포부만 품고 사는 것이 잘하는 짓일까? 이 더러운 자본주의 세상에서? B의 뒤늦은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전업주부는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C는 공교육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공교육을 거부하고 벗어난 아이들의 지난한 삶에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가치와 시선으로 세상과 맞장 뜨는 아이들, 또 그들은 돕는 어른들의 힘겨운 세상살이를 지켜보노라면 너무나 안쓰러워 눈물이 날 정도이다. 하루 한 끼의 라면으로 버티면서 캄보디아, 인도, 네팔과 같은 가난한 나라의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아가는 26살 청년을 만나 미래에 대한 대책을 세우라며 진심어린 충고를 한 적이 있단다.

그러자 청년은 해맑은 눈빛으로 '저는 그들에 비하면 가진 것이 참 많아서 행복해요'라고 말해 C는 몸 둘 바를 몰랐다고. 자기가 어느덧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기성세대가 되어 한없이 가난해 보이는 후배에게 속물스런 충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 역겨울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행복한 세상은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도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겠냐는 C의 말에 모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D는 자기가 좋아하는 시민단체 활동가 일을 계속 하기 위해서라도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하다고 했다. 치솟는 물가와 월세, 전세난을 감당하며 용돈 수준의 활동가 월급으로 독립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런데다 자기의 의지대로 살기 위해 넘어야 할 불필요한 벽들도 도처에 널려 있다. 왜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느냐는 지극히 사적인 질문부터 무례에 가까운 주위의 말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그날이 올까하는 버거운 희망을 품어도 본다. 결혼도, 비혼도, 이혼도, 동거도 모두 한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써 선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 깨닫는 날이 진정 올 것인가는 나도 의문스럽다.

나는 이제부터라도 '페미니스트'에 대한 질타와 비난, 엄격한 도덕의 뭇매를 그만두도록 우리부터 노력하자고 제안했다. 왜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페미니스트'들은 적이 되어야만 하는가? 완벽한 인간이 곧 '페미니스트'라는 공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자녀의 성패가 엄마의 자질과 평가에만 1백% 적용되던 세상은 지났다. 아직도 남자는 돈만 잘 벌면 되고, 여자는 아이만 잘 키우면 된다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으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면 '페미니스트'의 진정성을 고민하는 우리들부터 모두를 불행으로부터 건져 올리는데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페미니스트'인 엄마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자식들이 있고, 가사노동에 팔 걷어 부치는 살뜰한 남편이 주위 시선 아랑곳 않고 당당해지는 세상을 꿈꿔본다.

'네 자식 교육이나 똑바로 시켜', '너는 남편, 자식 신경 쓰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어 좋겠다'는 비아냥과 힐난 속에서도 꿋꿋이 자기 정체성을 지켜온 '페미니스트'들과 만나고 싶다. 그들의 속 깊은 한숨과 눈물을 위로하고, 끝내 주저앉지 않고 오늘에 이르게 된 동력의 근원도 배우고 싶다. 자식의 미래를 담보로 하여 여자들의 약한 고리로 끝내 발목을 잡게 하는 '교육'에 집착하기보다 "나처럼 당당하게 너의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페미니스트' 엄마들을 응원해야 할 시대이다.

자존심을 지키며 당당하게 세상에 나서는 이들을 배곯지 않고, 주눅 들지 않게 하는 정부와 정책을 지지해서 잃어버린 권리도 되찾아야 할 때이다. 우리가 고백했던 이 날의 회의 풍경처럼 주목받지 못하고, 소외된 소수를 위해 다수의 공감을 얻어내는 멋진 '페미니스트'들이 활개 치는 세상을 또 다시 꿈꾸어본다.


#페미니스트#자녀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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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모작을 솔향 가득한 강릉에서 펼치고 있는 자유기고가이자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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