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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10여 명 살아남았다. 저도 거의 죽음을 만져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생을 몇 번이고 생각하면 가슴 아픈 부분이 있고, 흐뭇한 부분이 있다. 쌀밥 먹고 좋은 옷 입은 것은 죽음 앞에서 가치가 없다."

 

비전향 장기수 임방규(80) 선생이 '왜 전향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한 대답이다. 그는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이 사형을 받고 죽었는데 살아남았다고 해서 전향할 수 없었다고 한 것이다.

 

오랜 감옥 생활을 했던 그는 "적은 밥을 먹을 때, 보리알·쌀알·콩알이 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 밥은 농민과 노동자들이 만든 것이다. 노동자·농민 없는 사회가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깨쳤으면 노동자·농민을 위해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전향 장기수 임방규 선생.
비전향 장기수 임방규 선생. ⓒ 윤성효

 

대북지원단체인 ㈔하나됨을위한늘푸른삼천이 23일 저녁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남지부 강당에서 임방규 선생 초청강연회를 열었다. 6․25가 난 뒤 1950년 10월 임실 성수산으로 입산했던 그는 1952년 3월 체포되어 사형 언도를 받았다가 무기징역·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1972년 석방되었고, 1977년 10월 재수감되었다가 1989년 석방되었다.

 

32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1977년 4월 결혼했던 임방규 선생은 '민중탕제원'을 운영하고 2000년 통일광장 대표를 지냈다. 올해 팔순 기념으로 이날 초청강연회가 열린 것.

 

일본강점기 이야기부터 꺼낸 그는 "어른들은 이야기를 할 때는 '일본사람'이라 하지 않고 '왜놈'이라 말했다. 어른들의 의식 속에는 반일의식이 있었다. 아이들은 민족의식이 없이 가르치는 대로 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교육을 받았기에 머릿속에는 자본주의가 남아 있다. 그런 것을 극복해 가면서 조국은 하나이고, 양분된 조국을 어떻게든 우리 시대에 통일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전향 장기수 임방규 선생.
비전향 장기수 임방규 선생. ⓒ 윤성효

농지개혁을 설명하면서 그는 "우리 민족은 상당히 부지런한데, '춘궁기'를 넘기지 못하고 굶거나 죽었다. 조선시대 진보적 학자들은 이 문제를 근본 해결하는 방법으로 농민한테 농토를 고르게 나눠주고 개인이 농토를 사고팔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면서 "그런데 조선시대 양반들이 듣지 않아 실현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친일파에 대해 설명한 그는 "5년간 독일에 지배를 당했던 프랑스는 조국을 배반했던 사람들을 처단했다. 그런데 우리는 36년 동안 고통을 당했고 일제에 협력한 악질분자들이 많았는데 한 놈도 처단되지 않았다. 왜냐. 미제가 친일파를 등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해방 직후 친일파들은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때 공포 속에 있었다. 캄캄한 나락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미군이 건져주었다. 그러니 그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미제에 충실했다. 지금도 그렇다. 지금도 큰 나라에 등을 기대고 살다가 그들이 떠나버리면 해방 직후처럼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미군이 나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지진을 당한 일본을 도와주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임방규 선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난 11일 전적지 답사를 할 때였다. 유서 깊은 마을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어르신 한 분이 오토바이 타고 가다 세워놓으면서 말했다. 지금 방송에는 일본에 지진 났다고 난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 분은 '국민학교' 2학년 때 해방됐다며 동경 같이 큰 데서 더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할아버지들은 일제에 응어리가 맺혀 있다. 지금도 일본은 잘못을 사과하지 않고,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긴다. 그것은 지배층이다. 일본 지배층과 민중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 지배층은 증오하고 적이지만, 죽고 고통받는 민중들에 대해서는 애정을 가져야 한다."

 

삶 속에 가장 후회한 적이 언제냐는 물음에, 그는 '산에 있을 때'와 '누이를 때렸을 때' 이야기를 했다.

 

"1951년 대공세가 이루어졌을 때였다. 우리가 탈환했던 수십만 발의 총알을 갖고 다닐 수 없어 땅속에 묻어 두었다. 상급자가 저한테 소대 병력을 주면서 총알을 갖고 오라고 했다. 그때 감기가 걸렸다고 했더니 이마를 짚어보더니 '펄펄 끓는다'며 다른 사람을 파견했다. 두어 시간 뒤 골짜기로 국방군이 들어와서 이동해야 했다. 그냥 부대와 같이 행군했다. 저녁 내내 걸었는데,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속으로 '감기 들었다고 한 것은 뭐냐'는 의문이 들었다. 의식적으로 총알을 가지러 가는 것이 두려워서 감기가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있을 때 그 생각이 나면서 마음이 아팠다. 후회했던 대목이다."

 

"국방군과 경찰이 골짜기로 쳐들어왔다. 이동하던 중 한 마을에 들러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 이동하려고 했다. 어느 집 헛간에 숨어 있는데, 저녁에 아주머니가 방에 밥을 차려 놓았다며 방에서 먹으라고 했다. 보초 세우는 게 원칙인데, 낮에도 무사히 지냈기에 빨리 밥을 먹고 가면 되겠다는 생각에 보초를 세우지 않았다. 밥을 2/3 정도 먹고 있는데 국방군이 닥쳤다. 싸리문 사이로 가려다가 넘어졌다. 어둠 속에서 국방군이 총을 겨누며 덮쳤다.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 그랬다. 그 순간을 후회한다."

 

"5살과 9살 밑의 누이 동생이 있었는데, 여름방학 때 수학문제를 가르쳐 주었다. 수학 공식을 이해시키면 응용문제를 풀 것이라 봤다. 그런데 문제를 못 풀기에 종아리를 때렸다. 펑펑 울었던 적이 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 앞에서 그때 생각이 났다. 왜 때렸을까 하고 후회했다."

 

 비전향 장기수 임방규 선생은 23일 저녁 창원에서 강연했다.
비전향 장기수 임방규 선생은 23일 저녁 창원에서 강연했다. ⓒ 윤성효

임방규 선생은 "지금 할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면서 "누가 보든 안보든, 뭐라 하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헌신하는 삶은 후회하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시간을 아끼며 살아야 한다는 말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해방 후 반동세력과 미제가 결합된 힘이었다. 인민이 하나로 튼튼하게 결속했더라면 물리쳤을 것이다. 그런 데서 교훈을 많이 얻는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네가 옳니 내가 옳니 분파적인데, 하나로 모아야 한다. 단결을 놓치면 안 된다. 그런 내부 단결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느냐, 어떻게 강화시켜 나가느냐에 따라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다."


#비전향 장기수#임방규 선생#늘푸른삼천#통일광장#민중탕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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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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