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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어둠의 농도가 한결 옅어졌다. 엷은 빛이 게릴라처럼 어둠 속을 파고들어 박명(薄明)을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다. 장거리 이동의 고단함도 여행의 설렘을 이기지 못하고 몸의 키를 내어줬는가 보다. 찌뿌듯한 몸에 시동을 걸고 일어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다. 시차 때문에 일찍 일어난 것이다. 새벽에 일어났으니 짜오푸라야 강가에 있는 새벽사원에나 가자고 맘 먹었다. 

새벽 사원  정식 명칭은 '왓아룬'이다
▲ 새벽 사원 정식 명칭은 '왓아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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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서영이는 여독이 풀리지 않았는지 일어나지 않았다. 카메라를 둘러메고 나오자 여명의 빛 속에서 주황색 가사들이 좀비처럼 돌아다닌다. 옷이라기보다는 기다란 천을 둘둘 만 것 같은 가사는 한결 밝아진 여명 속에서 선명히 드러났다. 낮에는 사원에서조차 보이지 않던 그들인데 새벽에 안개처럼 스며나왔다. 

새벽의 송크람 사원  어린 승려들이 청소를 하고 있다
▲ 새벽의 송크람 사원 어린 승려들이 청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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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산의 한복판에 있는 송크람 사원의 승려들이 새벽 탁발에 나섰다. 밤새 달아오른 열락(悅樂)의 잔열들을 씻어내듯 승려들은 조용히 골목골목을 누비고 있다. 그들은 모두 맨발이다. 행여 깨진 병이나 미처 끄지 못한 담뱃불이 있을지도 모르는 도시의 뒷골목을 그저 태연히 걸어간다.

그렇게 가다보면 어느 골목에선가 사람이 나와 스님의 옆구리 찬 바리에 음식을 넣고 그 앞에 꿇어앉는다. 그러면 스님은 앞에 꿇어앉은 사람을 위해 공덕을 빈다. 꿇어앉은 사람도 두 손을 합장하며 기도를 하고 스님은 스님대로 축원의 주문을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그런데 그것이 형식적이거나 요식적이지 않고 제법 진지하게 오랫동안 이어진다. 그렇게 하루의 시작을 축원과 기도로 시작하는 이곳 사람들이 초침을 다투어가며 달려가는 우리네 삶보다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여행객의 관대한 시선 때문일까.  

속세와 거리를 둔 우리의 스님들과 달리 이곳 승려들은 사람들과 밀착돼 있다. 사원은 시장이나 번화가의 한복판에 있고 스님들은 이웃처럼 친근하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들과 만나는 시간은 새벽 탁발뿐이다. 해가 뜨고 일상의 시간이 시작되면 승려들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다. 태국의 어느 도시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태국 승려들은 새벽에만 속세에 나왔다가 나머지는 그들만의 산문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우리의 절이 공간으로 속세와 거리를 두었다면 태국의 사원은 시간으로 속세와 문을 닫은 것이다.

시주를 하는 여인 바리에다 음식을 넣고 있다. 승려들에게 돈을 시주하는 것은 금하고 있다.
▲ 시주를 하는 여인 바리에다 음식을 넣고 있다. 승려들에게 돈을 시주하는 것은 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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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고 신도, 축원하는 스님 시주를 받고 나면 스님이 축원을 해준다.
▲ 기도하고 신도, 축원하는 스님 시주를 받고 나면 스님이 축원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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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 중에는 이제 사춘기가 시작된 앳된 승려가 있고 짧은 머리로도 허연 서리를 감출 수 없는 노인 스님도 있다. 사원 안에 들어서니 어린 승려들은 빗질을 하고 늙은 승려는 어슬렁거린다. 동남아 불교국(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에서는 남자들이 생에 한 번 씩은 승려생활을 한다고 한다.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푸미폰 국왕도 승려 생활을 거쳤다. 대부분 어린이나 사춘기 시절에 경험을 하지만 때론 어른이 되어서 재출가하는 승려도 많다고 한다. 생의 출발점에서 절제와 경건함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종교적 삶을 체험하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앳된 승려 사진을 찍어도 돼냐고 하니까 무덤덤하게 포즈를 취해준다.
▲ 앳된 승려 사진을 찍어도 돼냐고 하니까 무덤덤하게 포즈를 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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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고 날이 밝자 어린 스님들은 사원 안으로 모두 들어가고 나이든 승려들만 하릴없이 돌아다닌다. 여행의 첫 아침을 맞는 날, 나는 '새벽사원'보다 '새벽에 사원'을 보는 것이 훨씬 좋았다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오니 아내와 서영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침은 노점식당의 죽으로 해결했다. 향료가 들어가지 않은 죽은 부드럽게 입안으로 들어갔다. 안남쌀 특유의 부슬거림은 죽에 딱 어울렸다. 아내는 '딱이다' 라고 소리쳤고 서영이는 '냄새가 이상해' 하며 망설였다.

길거리 죽집 아침에 간이 식당이 많이 열린다.
▲ 길거리 죽집 아침에 간이 식당이 많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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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D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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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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