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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지식이 인간을 그릇 인도하기도 한다는 데서, 우리는 도구적 인간이 보이는 한계를 여실히 보게 된다. 어떤 도구나 그릇이든 잘 쓰면 득이 되지만 반대의 경우엔 독이 된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공부를 '잘 못하여' 독이 되는 사례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가. 내가 이 책을 잡은 건 순전히 그때문이다.

공부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는 '모르는 것을 배우고 익히는 일'이다. 공부를 다른 필요성이나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와는 다른 답변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공부의 대상을 고려하기만 해도 공부에 대한 설명은 끝을 정하기 어렵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부터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력', '존재의 근원 탐구', '세상이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이나 현상과 자연 현상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일', '무지로부터 자유'에 이르기까지 공부의 폭은 넓기만 하다.

그런데도 공부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선 '학교'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면, 단순하고 그 경계가 너무 뚜렷해져 의미를 따져보는 일이 외려 무색해지고 만다. 학교 현장에선 독서와 공부를 전혀 다른 것으로 여기거나, 독서를 하는 건 학과공부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며 학과공부만을 부추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만큼 학교공부는 공부 본래의 울타리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공부는 반드시 경쟁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하고, 일류대학 쪽에 기대어야 하는 것이고, 학원이나 개인 과외까지도 불사할 만큼 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학생들에게 공부는 일상의 전투가 되고 있다.

이 책을 쓴 김세걸은 이런 공부법이나 공부 분위기에 동조할 수 없다며, 작심하고 새로운 공부법 하나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바로 여행이라는 공부법을 통해 획일적인 공부나 공부법에 제동을 걸겠다고 계산한 듯하다. "아이들을 공부만능주의라는 주술에서 해방시켜 보겠다.(87 쪽)"는 얘기다. 7년 전 초등학교 3학년 아이와 함께 했던 여행기를 바탕으로 쓴 이 책은, 필자가 자신의 아들에게 학교공부에선 얻을 수 없는 '여행'이라는 방식을 통해 너른 안목을 길러주고 동시에 인성교육을 시켜보려 했던 의도가 뚜렷해 뵌다.

그는, 아이들에게 정말로 소중한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감성이며, 감성을 키워가는 게 중요하다 한다. 감성이라는 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정말로 필요한 자산이라고 이 책 곳곳에서 이야기한다. "추억이 없는 인생은 삶을 허전하게 만든다.(24 쪽)""아이와 싸워가면서 그것(학습지)를 시키고 싶지 않았다.

수년 만에 모처럼 누리는 아이의 해방감과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다.(103 쪽)""나는 영어, 수학 공부는 열심히 시키면서도 동화책 읽을 시간을 안 주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요즘 아이들이 어떤 공상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궁금했다.(167 쪽)""인생을 살아가는 데 공부 이외에도 중요한 것들 운동, 독서, 음악감상, 친구 사귀기 등등 많으니까.(234-5 쪽)"학과 공부는 확실히 감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학과 공부를 잘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물에만 만족한대서야 아이들이 어디 즐겁고 행복한 삶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이 책 저자의 얘기가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학교 공부에서 이른바 중요 과목에 대해서도 이 책의 저자는 각을 세운다. 특정 과목을 선호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이냐는 말이다. 흔히 수학이나 수리학(數理學)은 학과공부에 가장 중요한 요인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수학 과외는 우리 시대에 공부 좀 한다는 학생이라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통과의례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책의 저자는 상당히 의미 있는 시각을 드러낸다. "수학은 잘 하면서 역사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와 수학은 잘 못하지만 역사는 잘 이해하는 아이가 있을 때, 전자는 머리가 좋고 후자는 머리가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역사학과 교수들에게 물어보라. 수학이야 공부 좀 하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지만, 역사적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은 구제불능이라고 말할 것이다.(160 쪽)"

수학이나 수리학(數理學)이 학과공부에 가장 효율적인 능력이라 한다 해도, 모든 사람이 그 영역에 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어나 추리 능력에 상대적으로 능한 사람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능력을 모든 이에게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무지한 거다. 저마다 가진 능력의 차이를 존중하고, 저마다 가진 장점을 길러주는 공부방식이 더 적절하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의 저자는 '다원적 가치관을 이야기한다. "다원적 가치관이란 사람의 재능은 다양하고,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도 다양하기 때문에 공부라고 하는 일원적 잣대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234 쪽)"
  
여행기 형식을 빌린 이 책에는 다른 여행기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들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여러 역사/정치 사안들이나 정치 이념에 대한 저자의 접근방법이다. 또한 학교 공부가 도저히 접근하기 어려운 살아있는 정치 교육을 과감히 시도하고 있는 것도 좋은 시도로 보인다. "아이가 사회에 대해 책임감과 연대의식을 갖는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부패한 정치인에 대한 혐오가 정치 자체에 대한 혐오로, 나아가 건전한 민주시민의 권리와 의무의 방기로 나아가선 안 된다.(236 쪽)"

자녀 공부 시키기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는 우리 사회의 아빠들에게도 이 책의 저자는 한 마디 한다. "비로소 아이의 교육 문제를 엄마에게만 맡겨놓을 것이 아니라, 아빠들이 적극 동참하여 간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71쪽)"아이들의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아빠의 전향적인 자세로 들린다.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 공부법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공부법을 비판하고 새로운 공부법을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저자의 접근법 또는 말법에도 허점은 있다. 초등학생 3 학년 아이에게 여행지에서 예법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아이의 자유로운 여행에 부담을 주는 제재 행위로 보인다.

학교 공부를 비판하면서도 학교 공부 방식을 따라 하는 모습도 뵌다. "지금부터 공부만 열심히 하면 영어도 우리말처럼 쉬워지지. 그리고 미국에서는 돈만 있으면 한국 음식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어.(93 쪽)"여기서는 저자가,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모습뿐 아니라, 아이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남성주의 시각도 지나치기 어렵다."좀 힘들더라도 의젓하게 참아야 해. 남자가 좀 힘들다고 찡찡대면 안 돼, 알았지?(77 쪽)"

이 책의 저자가 아이에게 끝없이 말로 가르치려 한다는 것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여행을 통해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려는 방식은 학교에서 하는 방법이다. 여행을 통해 아이가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익혀가게 두었더라면 여행을 통한 교육은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말이나 글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지식을 풀어내는 우리 시대 지식인들의 한계이자 현주소를 이 책의 저자가 또한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공부의 의미에 대해 더 깊이 탐색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 것도 아쉬워 보인다. 이 책의 독자들을 학부모 다중에게 맞춘 탓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우리 시대 '공부'와 학과공부의, 의미와 공부법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고 찾아보게 되었다. 이 점 이 책을 쓴 이에게 감사한다.

내 딸은 대안학교를 그만둔 지 이제 3년이 다 되어 간다. 이젠 일반학교다. 그런데도 그에게 내가 학과 공부의 성적을 요구하지 않은지 오래다. 그에게 감성을 풍부하게 하는 것 또한 학과공부 못지않게 중요하다. 아빠로서 나는 그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한참이나 부족하다. 요즘엔 그에게 공감하는 능력을 부지런히 기르고 있다.

학과공부를 그에게 강조하거나 강요하지 않은 게 어쩌면 먼 훗날 나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에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예나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내 딸이 공부를 통해 정말로 스스로 기쁘게 만족하고, 공부를 통해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길을 열심히 찾고 있노라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세걸, <아빠의 특별한 여행 수업> 서울:씨앤톡, 2010



아빠의 특별한 여행수업 - 아이의 재능과 창의력을 키워주는 26가지 자녀교육 오디세이

김세걸 지음, 씨앤톡(2010)


#공부#앎을 통한 자유#공부법#존재의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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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이 사물을 올바로 담아낼 때까지, 사물들을 올바로 이끌어 낼 때까지 말과 처절하게 대면하려 한다. 말과 싸워서, 세상과 싸워서, 자신과 싸워서 지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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