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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7일


 13일 필리핀 바클로드 시내 모습
 13일 필리핀 바클로드 시내 모습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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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다른 여운을 남긴 두 만남이 있었다. 하나는 '진정한 크리스천'과의 그것. 어학원 내 유일한 미국인 여자 튜터(tutor)와 저녁식사를 했다. 풍만한 체구에 정이 많은, 예순이 넘은 여인이다. 작년 가을쯤 아흔 넘은 모친이 세상을 떠났고, 미국에 두 딸이 있지만 계속 이곳에 살 거라 한다.   

어학원에서 평소 5분 거리 레스토랑에 가는 데 약 한 시간, 주문하는 데 30여 분. 생각보다 늦은 식사였다. 무척 꼼꼼하게, 그래서 약간의 인내심을 요했던 그녀의 메뉴 선택은 어쨌거나 탁월했다. 프랑스식 양파 스프에 타일랜드 해물 커리, 그녀 몫의 인디언식 커리, 차가운 과일 쥬스의 궁합이 적절했다.

발음 수정을 겸해 다양한 대화가 오가던 중 종교 이야기가 나왔다. 그녀는 크리스천이었고, 나는 언제나처럼 "모든 신을 존중한다"고 했다. 그리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전쟁을 벌이는 인간 부류들을 혐오한다"고도 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말로 해봐야 소용이 없다. 동시에 말로는 불교신자고 무슬림교도라거나 무신론자라 할 지라도 그 삶이 크리스천다우면 하나님 눈엔 크리스천으로 보일 것이다."

또 다른 만남은 'Honor(명예·체면)'에 관해 생각케 했다. 절대 비밀로 해줄 것을 부탁하며 얼마의 돈을 빌려간 외국인이다. 늦은 오후 어학원 내 카페테리아 앞을 지나는데 그녀가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평소에 무척 상냥했던지라 무슨 일이 있냐 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크게 한숨을 쉬며 "아주 심각한 일이 생겼다"고 했다. 잠시 후 급기야 눈물까지 훔쳤다. 가까운 지인이 돌아가셨거나 사고를 당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알려준 '심각한 일'이란 약속한 돈을 제날짜에 받지 못했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약속은 신뢰의 문제이며, 자신의 "Honor"과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심 그것이 저리도 한숨 쉬며 울 일일까 싶었다. 곁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푸념을 늘어놔서 대체 얼마가 필요하냐 물으니 2500페소(한화 6만 3천여 원)라고 했다.

다소 의뭉스러웠지만 소속이 분명하고, 나이도 지긋한 사람이 오죽했으면 싶어 본인 돈을 빌려줬다. 처음엔 그럴 수 없다고 (딱 한번)거절했지만 이내 "정말 고맙다"며 수락 의사를 밝혔다.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그리고 서너 번인가 더 자신의 "Honor"를 역설했다.

자취가 길었고 수년간 회사생활도 했기에 일면 이해가 됐다. 그리고 그녀 말들이 영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돈을 받자마자 눈물 가신 얼굴로 새 담배부터 사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명예나 체면 같은 단어들은 왠지 멀게만 느껴졌다.(참고로 삼 일 후에 돈을 갚겠다던 그녀는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바클로드 푼타 타이타이 파라이소 비치
 바클로드 푼타 타이타이 파라이소 비치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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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0일

양동이로 퍼붓는 듯한 폭우 속에서 바다를 보고 왔다. 수업이 있는 평일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욕구였다. 낡은 지포니 안에서 30여 분쯤 비바람을 맞았을 때 PUNT TAYTAY에 도착했다. 이곳에 바다가 있다는 얘기를 두 주 전 튜터에게 들었다. 차에서 내려 기사가 손으로 가리킨 방갈로숲을 지나자 한국 서해와 닮은 해안이 펼쳐졌다.

넓은 갯벌에선 필리피노 아이 셋이 축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그 중 한 아이가 카메라를 의식해 돌발행동을 했다. 갯벌에 드러누워 팔을 개고 폼을 잡더니 이어서 덤블링을 했다. 우산 받치랴 사진 찍으랴 혹여 있을 가방털이범 경계하랴 정신이 없는데 문득 비를 피하려 애쓰는 건 본인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축구하는 아이들도 반 벗은 몸이었고, 근처서 그물 손질을 하던 두 노인 또한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 가족으로 보이는 현지인 한 무리는 정박해둔 배 위에서 어구를 정리하고 어선에 갇힌 물을 퍼내고 있었다.  초록색 '땡땡이' 우산을 쓴 내가 마치 수묵화에 떨어진 한 방울 원색 물감 같았다.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어선을 손질 중인 필리피노 가족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어선을 손질 중인 필리피노 가족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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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갈 수록 비는 거세졌다. 민가가 모인 근처 마을은 이미 또다른 물바다였다. 어느 골목길 안에서 쌍둥이 같은 두 꼬마가 무릎까지 오는 물 속에서 장난질을 쳤다. 뒤따라 나온 젊은 엄마가 수줍게 웃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그대로 오늘이 푼타 타이타이에 장이 서는 날이었는데 상인도 물건도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점심 무렵 어학원으로 돌아왔다. 갑갑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홀로 즐기는 고독은 나를 편케 한다. 때때로 깊은 밤 같은 고독이 두렵기도 하지만 부질없이, 그저 잡다하기만 한 일상 속에서 그것은 나를 해방시켜준다. 그리고 여린 내 자아를 돌아보게 한다. 바다 앞에 섰을 때 자아가 물었다.

'나는 왜 뿌리내리지 못하는 걸까? 왜 스치는 것들에 더욱 애정을 느끼는 걸까? 왜 언제나 얼마 만큼의 서글픔을 안고 있을까?'

모를 일이다.

 (시계 방향으로) 자전거 위의 모자, 달리는 지포니 안에서 눈이 마주친 생선가게 주인, 물놀이가 그저 즐거운 꼬마들, 바다 이름을 알려준 필리피노 아주머니들
 (시계 방향으로) 자전거 위의 모자, 달리는 지포니 안에서 눈이 마주친 생선가게 주인, 물놀이가 그저 즐거운 꼬마들, 바다 이름을 알려준 필리피노 아주머니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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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twitter ID : sindart77 홀로 꿈을 좇는 여정에 매력적인 벗들의 응원과 멘토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크리스찬#바클로드#필리핀어학연수#필리핀홍수#TAY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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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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