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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 감찰실에선 숫자가 쓰인 부분을 좀 더 밝은 곳에 드러내 주위를 살펴나갔다. 그곳에 어떤 표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위아래를 세 겹으로 접은 종이는 일정한 틀을 갖추고 있음을 서감찰이 지적했다.

"나으리, 살해된 자가 지닌 종이에 끼적인 숫자는 사내의 질환을 나타내는 칠손(七損)으로 보기엔 합당치 않습니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정약용은 '7'이 성의 쇠약을 비롯해 조루나 불능, 위축, 과로시의 교합, 음주나 내장장애, 과도한 방사로 몸이 상한 증세를 뜻하는 것이라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그게 합당치 않다···.'

그게 '팽조비방'에 있었고 보면 일곱이란 숫자는 사내 몸에 찾아오는 복병같은 질환이 분명해 보였다.

'허나, 왜 그게 필요했는지 모르겠구먼. 검시의의 설명에 의하면, 칠손은 정기가 고갈되는 절기, 자연스럽게 정액이 흐르는 일정, 사내의 힘을 무리하게 일으켜 세워 사용하는 탈맥, 피로하여 땀을 흘리고 그 땀이 마르기 전 방사를 하는 기설, 대소변을 마치고 신체의 기능이 정상화 되지 못했을 때 교합을 가지는 기관궐상, 음란한 여인으로 인해 정액이 고갈돼 사정하려 해도 정액이 나오지 않은 백하, 힘겨운 일을 한 후에 교합을 가져 피가 마르는 혈갈을 가리킨 말이다.'

이것은 사내가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증세에 빠진 것과 다름없다. 평소 임찬호가 하는 짓으로 봐선 대전별감으로 있는 박상원(朴相元)의 집안과 은밀한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사헌부 서리배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댁은 혈육이라곤 시집간 딸아이뿐으로 아들이 없었다.

'흐음,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아들을 낳아줄 여인을 구하려 망월사 여승을 집안에 끌어들였다. 한데, 하필이면 여승인가?'

서과가 망월사에서 온 여승을 만나려 그 댁의 별당에 갔을 때 그녀는 집에 없었다. 아들을 낳기 위해 왔다면 당연히 '이슬 먹는 법'도 배워야 했지만 그녀는 가까운 절을 찾아가 공덕을 빌기 위해 별당을 비운 것이다. 마나님은 별당의 행방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풀어놓았다.

"가까운 곳에 공들이러 갔거나 점치러 갔겠지. 자네가 무슨 이유로 내 집에 왔는 지 모르겠네만, 별당 그 아인 틀림없이 여승이지만 지금은 주인 나으리의 대추받이일세."
"첩실이 아닙니까?"

"그렇다니까. 내가 허튼소릴 할 이유가 없잖은가. 그 아인 산중에서 내려왔고 잠자리 시중을 배운 적이 없는 비구니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왔으나 남녀의 합금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사포루의 초란이에게 보내 교육 받게 했으니 어느 정도 일러줬으리라 보네."
"주로 어떤 것입니까?"

"글쎄···. 자네같은 시집 안간 처녀가 가시버시들의 은밀한 대화를 알기나 할까? 자네, 음액지음(淫液舐飮)이라면 알아듣겠는가?"

처음 듣는 말이라 서과는 입으로 가만히 되뇌이며 마나님을  바라보았다. 여인들이 의서를 가까이 하지 않은 탓에 마나님은 뜻 모를 소리처럼 뇌까렸지만, 그녀가 의녀였던 것을 모르고 있었다. <황제내경>의 '오장별론편(五臟別論篇)'에 이런 말이 있었다.

'뼈는 수(髓)를 저장하는 탱크며 맥(脈)은 혈액의 탱크다. 수와 맥은 뇌속에 모이므로 뇌를 가리켜 정수(精髓)의 바다(髓海)라 한다.'

흥미로운 건 이 정수가 혀 밑에 모여 못(池)을 이룬다는 점이다. 이것이 화지(華池)다. 화지엔 두 줄기 구멍이 있어 쓸개로 통하는데 그 구멍 이름은 염천(廉泉)과 옥영(玉英)이다. 마나님과 얘기할 땐 몰랐지만 서과가 사헌부로 돌아오자 검시의는 흥미로운 말을 던졌다.

"한방에선 간을 피의 바다라 하네. 쓸개는 부부사이와도 같은데 뇌수의 정수가 한자리에 모여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니 그게 입침(唾液)이지. 합금(合衾)할 때 온 몸이 달아오르면 입침이라 부르는 고농도의 생명수가 흘러나온다네."

과연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승에게 해본 말이라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훗날 칠손(七損)으로 밝혀진 이것들은 무리한 성생활에서 오는 질환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렇게 보면 죽은 자는 여승을 끌어들여 대추받이 여인으로 삼으려는 뜻이 다분했다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요즘들어 시중에 흘러다니는 노래가 쓸쓸한 것만 보아도 여승이 별당에 깊이 눌러앉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미골은 갈수록 멀어지고
눈앞엔 망우리가 가로뻗었네
그리움을 짊어지고 한 치 한 치 돌아올 때
석양볕은 옷깃에 쏟아지네요

서정성이 높은 노래로 만인의 사랑을 받았지만 정약용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이 열여덟의 그녀가 대전별감의 '대추받이' 여인이 됐다는 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희한한 일이었다. 여승이 머물렀다는 망월사를 다녀온 서감찰은 놀랄만한 얘길 꺼내놓는다.

"나으리, 월계(月溪)란 여승이 임찬호를 만나 단번에 환속한 건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유, 무슨 이윤가?"

"어렸을 때 헤어진 오라버니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답니다."
"오라버니라면 누굴 말하는가?"

"역촌에서 살 맞아 죽은 사냅니다. 그 자는 간룡척을 지닌 데다 두 대의 살까지 맞아 예사롭게 생각지 않았습니다만, 알고 보니 그 자는 대비전의 사포 직에 있던 나상욱(羅尙旭)이었습니다. 이같은 소식은 망월사의 월인 스님이 들려준 말입니다."

"그 스님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가?"
"양찬호가 그곳까지 와 오라비가 죽은 걸 가르쳐 준 모양입니다. 스님이 있는 자리니 모든 사실을 듣고 난 후 환속을 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약용은 그제야 알듯 싶었다. 요즘 시중에 '원게'라는 가사가 흘러다니는 게 아무래도 심상찮았다. <승가>는 남휘의 설레는 마음을 묘사한 것이고, '남도사십해'는 비구니의 마음을 묘사한 것이지만 구애의 도구로 사용한 가사가 너무 쓸쓸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서감찰이 운을 뗀다.

"나으리, 망월사에서 온 여승은 대전별감의 대추받이 여인이 됐다지만 아직 첫날밤을 치루지 않았답니다. 어찌 보면 그 여승은 오라버니의 원한을 풀려고 할 것이고, 이를 잘 모르는 그 댁에선 여승의 몸을 통해 아들을 얻고 싶다는 욕심이 있을 것입니다."
"흐음, 어찌 됐건 내일은 그 댁에 들려 환속한 여승이나 만나보세."

다음날 아침, 사헌부 서리배들이 도착했을 때 현장은 앙상한 뼈대만 남기고 화마가 모든 걸 삼켜버린 뒤였다. 군데군데 퍼런 연기가 가물거리고 주위를 둘러 봐야 무엇 하나 건질 것 없이 모두 타 버렸었다.

여인의 사체는 무너진 흙더미에 깔려 동쪽 구석에 널브러진 채 사헌부 서리배들이 당도할 때까지 묻혀 있었다. 송찰방 집에 들르려 했던 정약용이 화재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도착해 주변을 살피다 사체 주변에서 한 자루의 은장도를 발견했다.

기이하게 여긴 것은 여인이 불에 타기 전 목을 매달았다는 점이다. 뒤늦게 도착한 서과가 검시기록을 펼쳐들자 정약용의 목소리가 날아 내렸다.

"불에 탄 주검 위에 쏟아진 그을음과 흙먼지를 털어내면 무엇이 나타나느냐"
"사체의 오금 등을 살폈으나 이렇다 할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불에 탄 사체를 가장 먼저 살피는 관문이다. 싸우다 맞았거나 손으로 밀어 불 속에 들어가면 상처는 대부분 오금과 둔부 그리고 넓적다리 뒤쪽에 생긴다.

"여인의 목에 줄을 건 흔적이 있으니 누군가 몰래 불에 던졌다고 생각할 수 없다. 목 아래 흔적이 있느냐?"

졸린 흔적을 가리키는 말이다. 없다. 얼굴에서 전신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탔고 매인 끈이 목에 감겨 죽은 걸 보면 분명 자액(自縊)이었다. 여인의 목을 조르고 불에 던져 태운 상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검시기록이 작성되고 특기할 만한 몇 가지 상황에 병기되었다. 여인의 목 가까이엔 은장도와 약간 탄 목매단 끈이 있었다. 죽은 여인에 대한 검안과 검시기록을 위주로 서감찰은 뜻밖의 정보를 내놓았다.

"장안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양찬호가 이 댁에 여승을 데려온 건 '약'이었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약이라니?"

"대전별감 박상원은 몽중허한(夢中虛汗)으로 원기가 부실해 그 동안 내의원에서 한겨울에 춥지 않고 따뜻하게 겨울 나는 법을 가르쳐 준 모양입니다. 몸채에 있는 마나님은 바깥어른이 몽중허한으로 원기가 부실하니 의원의 권유대로 쑥뜸을 뜨려했지만 대전별감이 싫다고 난리를 쳐 중단됐답니다."

"여승을 약으로 쓴다는 건 무슨 말인가?"
"중원에선 몽중허한을 다스리는 비방으로 무당파의 장문인 장삼봉은 사미(四美)라 했습니다. 예를 들면 눈썹은 맑고 꼬부장해야 하며, 입술은 너무 붉어서도 안 되고, 치아는 백분을 뿌린듯 하얘야 하며, 손가락의 옹이는 너무 패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그런 여인이 사내의 몸에 이로움을 줄 수 있기에 솥(鼎)이라 부른답니다."

"이 댁에 여승이 온 후 별당에서 이 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건 조사해 봐야겠지요."

일단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막고 금리(禁吏) 몇 사람을 두고 관아로 돌아오자 저녁 늦게 양재역에 괴이한 벽서가 붙어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옛사람들은 남녀가 유별해 남매라 할지라도 일곱 살이 넘으면 같은 자리에 앉지 아니하였다. 노나라의 재상 계강자가 그 종조모를 찾아갔을 때 문을 열고 대화했으나 문지방을 넘지 않은 걸 보고 '참으로 옳다'고 공자께서 찬탄하였다. 아내를 맞이할 때도 반드시 다른 성씨를 택해야 하고, 첩을 취하더라도 반드시 성을 물어본 다음 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 수치스러움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은 예의의 나라니 각자가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남자는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아니하고 여자는 사사로이 행동을 하지 않는다 했으니 이를 어기면 엄벌에 처하는 것이 선왕의 법에 담겨있다. 지금 세상이 복잡하고 사람들이 예절을 모른다지만 우리 선비들이 근근이 보존하는 건 성상의 법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 역촌에 사는 대전별감이 성상의 법을 무시하고 기탄없는 행동을 하니 어찌 나라의 법이 있다고 할 것이며 마을에 예절이 있다고 할 것인가. 더구나 목밀녀(木蜜女)란 대추받이 여인을 구했다 하니 어진 선비들이 사는 양재(良才) 역 가까이가 금수의 지경에 빠질 것이므로 이를 징치하노라.>
벽서 아래쪽엔 '7'이라는 숫자가 큼지막이 휘갈겨 있었다.

[주]
∎합금(合衾) ; 섹스
∎가시버시 ; 부부


#추리,명탐정,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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