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만주기행 여섯째 날(8월17일)은 아침 7시45분 하얼빈역에 도착해서 저녁 7시까지 버스와 유람선 등을 타고 시내투어를 했다. 온종일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설명을 듣고, 사진도 찍고, 메모까지 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표를 예매하면 5분 전에 나가도 되는 우리와 달리 중국은 출발시각 1시간 전까지 역에 나가야 했다. 사람도 많았지만, 개표 절차가 공항만큼이나 복잡하기 때문이었다. 해서 저녁을 게 눈 감추듯 먹고 단둥(丹東)행 야간열차(밤 8시40분)를 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했다.

 

 

중국도 공산국가이니까 하얼빈시 야경도 어둡고 경직되어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무척 화려하고 자유스러웠다. 거리를 오가는 여성들 옷차림이 서울 분위기와 별로 다를 게 없었고,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젊은이들 표정도 밝고 활기가 넘쳤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의 상표가 들어간 옥외 광고물들이 밤하늘로 높이 솟은 빌딩들을 더욱 환하게 비추어주고, 춤추듯 움직이는 네온사인 간판들은 유럽이나 미국의 화려한 도시의 중심가를 연상시켰다.

 

피부를 스치는 밤바람이 무척 시원했다. 대학생들이 배낭을 깔고 앉아 정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40여 년 전 나를 보는 듯했다. 여름이면 산과 동굴을 찾아다녔던 20대 시절이 시나브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얼빈역 광장의 야경을 감상하면서 심신의 피로를 풀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차표 잃어버리고 식은땀 흘리다

 

 

하루에 20만여 명이 이용한다는 하얼빈역은 인구가 1천만 가까운 도시답게 '심양'이나 '연길'역보다 규모가 크고 천정이 높았다. 대기실은 2층이었는데,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용객이 많아서인지 다른 역들에 비해 더 복잡한 것 같았다. 

 

좌석은 6인실 침대칸(잉워)이었다.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 틈에 끼어 차례를 기다렸다. 군복 비슷한 정장차림의 역무원들이 소란을 떠는 승객들을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질서를 지키라고 하는 모양인데, 내가 혼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언짢았다.

 

사람들이 어찌나 밀고 당기는지 사진촬영은 엄두도 못 냈다. 사람들과 밀치고 밀리면서 투시기가 달린 검사대를 통과하는데 얼마나 왕짜증이 났는지 모른다. 역무원의 불친절에 알아듣지 못하는 안내방송, 뒤에서 밀며 고함지르는 소리 등이 더욱 신경을 쓰게 했다.

 

겨우 검사대를 빠져나와 검표하려고 줄지어 기다리다가 갑자기 오른손이 허전해지는 걸 느꼈고, 그때야 차표가 없는 것을 알았다.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눈앞에 별이 보이면서 이마와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차표가 없으면 일행들과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미칠 지경이었다. 가슴이 자꾸 방망이질했고, 마음을 추스르려고 해도 가눌 수가 없었다. 위기를 벗어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가 동쪽이고 어디가 서쪽인지도 가늠하지 못하는 타국이니 막막할 수밖에. 

 

전남 광양의 모 중학교 교사 김남규 선생님이 차표를 분실한 것을 알고 다가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방법이 있을 겁니다"라며 위로해주었다. 나이 먹어서 말썽만 피우는 것 같아서 미안함만 더할 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수많은 인파에 질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안내방송 때문이라고 하지만, "소매치기와 기차표를 조심하세요!"라는 인솔자 당부를 무시한 것 같은 자괴감이 더욱 괴롭게 했다. 그래도 아내 먼저 안심시켜야겠기에 다가갔다.   

 

"어이,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행들과 함께 먼저 가라고. 나는 '대구청춘'(인솔자 닉네임)님 하고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 기차로 가면 되니까···."

"그래도 그렇지요, 나 혼자 어떻게···"

 

28년을 지지고 볶으면서 살아온 동갑내기 아내와 환갑을 맞이해서 처음으로 떠난 외국여행이었다. 그런데 기차표를 잃어버리다니, 어이가 없었다. 손수건 하나 분실해본 적이 없던 터라서 상실감이 더했다. 아내의 수심 어린 표정을 보니까 석별의 정을 나누는 사람처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차표나 입장권 등은 꼭 목에 걸고 다니는 명패에 넣어 보관했는데 그날은 손에 꼭 쥐고 차례를 기다렸었다. 그런데 짐 검사를 한다는 신호와 함께 갑자기 뒷사람들에게 밀리니까 바닥에 놓았던 가방을 급히 잡으려는 마음이 앞서 무의식중에 차표를 떨어뜨렸던 모양이었다.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발산하는 열기에 땀 냄새까지,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아무리 안정을 찾으려 해도 온갖 잡념과 불안감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등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안정을 찾아야겠기에 계속 심호흡을 했지만 별로였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암표장수로 보이는 젊은이가 다가왔다. 그는 침대칸 차표를 내보이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손가락을 오므리고 펴고 하는 것이 표를 사라고 하는 것 같았다. 기가 막혔다.

 

내 표를 도둑질해서 되파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했으나, 그런 어리석은 도둑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일행에서 이탈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에 암표상이 반갑기도 했다. 

 

곱절을 주더라도 암표를 사려고 지갑을 꺼내는데 박영희 시인과 인솔자가 다가와 사태를 파악하더니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뛰어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도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다리기를 10분 남짓. 박 시인과 인솔자가 저쪽에서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더니 "하얼빈에서 안내한 가이드 만나서 구입했습니다"라며 표를 내주는데 반가움과 고마움, 미안함이 뒤엉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인솔자는 6인실 침대칸 표를 건네주며 마침 이웃 칸이어서 어렵지 않게 오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모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지만, 어이없는 실수에 대한 상실감과 미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사태가 해결되니까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아내와 함께 플랫폼으로 걸어나가는데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일진광풍(一陣狂風)이 한바탕 휩쓸었던 밤이 지나가고, 희망의 일출을 가슴에 안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당첨된 로또 복권보다 기쁘고 반가웠던 하얼빈 역에서의 기차표 한 장.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로 남을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도 지옥과 천당을 오갔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얼빈역#기차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