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조선일보> 4일자에 <민간인 사찰 검찰 수사, 능력 부족인가 의지 부족인가>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검찰이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 사건 수사를 한 뒤 ▲ 지난달 14일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이 법정에서 "사찰 관련 사항을 이강덕 전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팀장(현 경기경찰청장)에게 구두 보고했다"고 진술했고 ▲ 그로부터 닷새 뒤에는 검찰이 사찰 대상자 이름 옆에 청와대(Blue House) 지시를 뜻하는 'BH 하명'이라고 적힌 지원관실 내부 문건을 수사 과정에서 확보하고 있었음이 드러났고 ▲ 1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행정관이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에게 엉뚱한 사람의 이름으로 등록한 '대포폰'을 만들어준 사실이 드러나는 등 '윗선'(청와대)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사설의 골자였다.

'청와대 대포폰' 의혹 집중 제기한 <조선>

기자가 이 사설을 눈여겨본 이유는 이 신문이 이틀 전에도 사설 <청와대는 무엇에 쓰라고 '대포폰'까지 만들어줬나>를 썼기 때문이다. 전자는 검찰을 비판하고 후자는 청와대의 책임을 묻는 내용이지만, 최근 논란이 된 '청와대 대포폰'이라는 주제는 동일하다.

<조선> 관계자들은 반론을 제기할지 모르지만 이 신문은 언론계에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으로 꼽힌다. 친한 사이일수록 상대의 허물을 거론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이명박 정부와 아주 가까운 것으로 분류되는 이 신문이 "민간인 사찰 사건을 유야무야 덮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계속 보내고 있는 셈이다.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의 2일 정례브리핑에서 대포폰 사건에 대한 청와대의 입장을 제일 먼저 물어본 사람도 이 신문의 청와대 출입기자였다.

<조선>만 방방 뜨고 있는 게 아니다. '청와대 대포폰'으로 대표되는 민간인 사찰의 '몸통' 규명을 촉구하는 3일자 신문 사설들을 추려보니 이랬다.

<경향신문> '대포폰'까지 줘 놓고 불법사찰 모른다니
<세계일보> 청와대는 '대포폰' 만들고 검찰은 은폐하고
<문화일보> 청와대의 불법사찰 연루 정황… 재수사 불가피하다
<중앙일보> 청와대 '대포폰' 의혹…부실 수사의 당연한 결과다
<한겨레> '대포폰'으로 사찰 지휘한 청와대가 바로 '몸통'이다
<한국일보> 민간인 사찰 청와대 개입 재수사해야

 총리실 불법사찰 피해자인 김종익 NS한마음 전 대표.
총리실 불법사찰 피해자인 김종익 NS한마음 전 대표. ⓒ 유성호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한겨레>·<경향>부터 중도 성향의 <한국>, 보수 성향의 <중앙>·<문화>까지 "청와대와 검찰은 대포폰 사건을 뭉개지 말라"는 '공동 성명'을 낸 것이나 다름없다. 청와대가 관련된 민감한 현안이 터질 때마다 언론사가 추구하는 노선과 크고 작은 이해관계에 따라 엇갈린 입장을 내놓던 신문사들이 이처럼 의견 일치를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현 정부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동아일보>도 민주당 강기정 의원의 '김윤옥 로비 몸통' 발언을 비판한 사설에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컴퓨터 하드디스크 파기 등 불법사찰 증거 인멸에 대포폰이 이용됐다면 범죄 행위다. 검찰은 이 사안의 실체적 진실을 분명하게 밝혀내 법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는 내용을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

청와대가 민간인 사찰의 실질적인 사령탑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증거물이 나온 상황임에도 계속 침묵하다가 훗날 "이명박 정부 시절에 '권력 감시'라는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했냐"는 역사의 물음이 두려운 것이 언론사 기자들의 고민이다. 설령 힘 있는 신문·방송·통신들이 권력을 편들고 담합한다고 해도 권력이 감추고 싶은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것이 과거의 교훈이었기 때문이다.

청와대, 무능하거나 혹은 음흉하거나

문제는 진실과 소통하지 않는 청와대와 검찰이다. 대포폰 의혹을 정면 돌파하고 납득할 만한 해명을 내놓지 않으면 정권의 도덕성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도 "(청와대에서) 대포폰이 지급됐다는 사실이 나왔어도 검찰이 적당히 넘어가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생각"(홍준표 최고위원), "청와대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체조사해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밝히고 오해를 푸는 노력이 필요하다"(남경필 의원)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은 2일 "이 문제는 검찰 출입기자를 통해 취재하라"고 검찰에 책임을 돌리고, 서울중앙지검 신경식 1차장 검사는 3일 "문제의 전화기는 5대가 아니라 1대이며, KT 대리점 주인의 가족 명의를 빌린 차명 전화"라고 해명했다.

중요한 것은 전화기 개수가 아니고, 설령 검찰의 설명대로 불법으로 개설한 대포폰이 아니라 차명으로 개설한 전화라고 해도 "청와대 행정관이 건넨 휴대폰이 범죄 증거를 은폐하는 데 이용됐다"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는데 검찰이 더 이상 청와대를 수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청와대 행정관이 범죄 증거 인멸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도 이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청와대의 태도는 더욱 심각하다.

총리실 직원에게 '범죄 증거 인멸' 용도의 대포폰을 빌려준 것으로 알려진 청와대 행정관은 전화를 받지 않고, 그의 동료들도 '회의 들어갔다', '외부에 나갔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청와대는 '민간인 사찰 사건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는' 대변인이 기자들의 질문을 한 차례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민정·정무·홍보라인의 관계자들이 사건의 진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청와대 직원들의 비위 행위를 감찰하고 잘못을 다스려야 할 민정수석실이 손을 놓고, 들끓는 여론을 살피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정무수석실이 '나 몰라라' 하고, "청와대가 사찰의 몸통"이라는 의혹이 있다면 이를 적극 해명해 대통령의 국정 부담을 덜어줘야 할 홍보수석실은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3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G20 정상회의 관련 내·외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3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G20 정상회의 관련 내·외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우성

이명박 대통령도 3일 G20 서울회의를 홍보하는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민간인 사찰 수사에 대한 입장을 밝혀달라"는 기자의 질문을 무시했다. 청와대 내에서 사건의 전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권재진 민정수석(검찰 출신)은 기자들과 접촉을 꺼리는지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G20 회의 한 번 치르면 국격이 올라가고 금방이라도 선진국이 될 것처럼 떠드는 청와대가 국제사회의 망신거리가 될 수 있는 민간인 사찰 문제만 나오면 잔뜩 움츠러든다. 당장의 위기를 어떻게든 피해가려는 듯한 청와대의 어수룩한 일처리를 보면, 이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공정사회'의 싹을 그의 임기 내에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민간인 사찰 건에 대해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관심을 일부러 끄고 있는 것인지 대통령과 청와대의 속내를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아는 게 없다면 무능하고, 알아도 모른 척한다면 음흉하고, 무관심하다면 직무 유기라는 비판까지 덮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포폰#김희정#민간인사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