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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 (사토 와키코 글·그림,이영준 옮김,한림출판사,1991.9.25./7000원)

 

 

.. 엄마는 힘차게 말했습니다. "좋아, 나에게 맡겨!" ..  (32쪽)

 

도깨비를 빨든 두꺼비를 빨든 예부터 우리 나라를 비롯해 숱한 나라에서는 '어머니'와 '할머니'와 '언니(누나)'만이 빨래를 하고 있습니다. 양말짝이든 손수건이든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형(오빠)'이 빨래를 하는 일이란 더없이 드뭅니다. 빨래를 해 주는 기계가 없던 지난날이든, 빨래를 해 주는 기계가 있는 오늘날이든, 빨래하기라든지 밥하기라든지 쓸고닦기라든지 아이보기라든지 온통 여자가 할 일로 여깁니다. 대학교를 다녀도 남녀가 함께 다니고, 일터에 다녀도 남녀가 함께 다닙니다. 그러나 혼인을 하고 난 뒤에 밥상을 차리고 집살림을 맡아 꾸리는 사람은 오로지 여자입니다. 남녀 둘 모두 바깥일에 바쁘다면 '여자인 아줌마'한테 돈을 주며 집살림을 맡깁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이든 이웃나라 일본이든, 할머니부터 언니까지 "좋아, 나한테 맡겨!"하고 외치며 소매를 걷어부칩니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이든 나어린 언니이든, 당신들한테 집살림을 맡긴다 해서 손사래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빨래이든 밥하기이든 애보기이든, 이런저런 집안일을 남자한테 시키면 어떠한 말이 돌아올까 궁금합니다. 이 나라 남자들도 여자들하고 마찬가지로 "좋아, 나한테 맡겨!" 하고 다부지게 외칠 수 있을는지요.

 

일본 그림책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를 넘깁니다. '우리 엄마'는 아주 씩씩합니다. 고되고 고달플 집일일 텐데 아무렇지 않은 낯빛으로 당차게 해냅니다. 당차게 해낼 뿐 아니라 기운이 남아돌아 고양이이고 강아지이고 도깨비이고 모조리 빨아치웁니다.

 

어쩜 이럴 수 있으랴 싶으면서, 어쩜 이럴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나이 일흔이 넘든 여든이 넘든, 할머니들은 당신 딸아들한테든 손자한테든 '밥을 차려 주려' 애씁니다. 당신 딸아들이나 손자가 차려 주는 밥을 얌전히(?) 앉아서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기가 울면 당신이 먼저 일어나서 달래려 하고, 아기가 오줌이나 똥을 지르면 당신이 손수 치우려 합니다. 먼지를 보면 당신이 걸레를 빨아 훔치려 합니다. 노상 일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언제나 일을 익숙하게 해냅니다.

 

집에서 하든 밖에서 하든 똑같이 일입니다. 집에서 하니 집안일이고 밖에서 하니 바깥일입니다. 집안일이 더 작다든지 더 크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바깥일이 더 크다느니 작다느니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집안일과 집밖일을 하기 마련입니다. 집안에서는 살림을 꾸립니다. 집에서 살아야 할 사람들 삶을 토닥이고 다스리며 어루만집니다. 집밖에서는 집안에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땀을 흘립니다. 텃밭에서든 논밭에서든 스스로 농사를 짓거나 어느 일터를 다니며 돈을 벌어 곡식을 사든, 집밖에서는 집밖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으레 '하루 여덟 시간 한 주 닷새 일하기'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일하기를 제대로 지키는 곳이란 공무원 일터 말고는 없지 않느냐 싶은데, 아무튼 집밖일이란 '하루 여덟 시간 한 주 닷새'를 넘지 않도록 마음을 기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루 여덟 시간은 잠을 자야 몸이 튼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루에 세 끼니를 먹든 두 끼니를 먹든 한 끼니를 먹든, 밥먹는 겨를을 두어 시간 또는 서너 시간 마련합니다. 씻는 겨를을 마련하고, 쉬는 겨를을 마련합니다. 하루 씀씀이를 돌아본다면 우리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놀러 다니거나 할 겨를이란 얼마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집살림을 꾸려 온 어머니들로서는 '하루 여덟 시간 잠자기'를 해서는 도무지 집안일을 맡을 수 없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 아버지들이 집밖에서 보내는 겨를이 길 뿐더러 집안으로 돌아와서는 손을 놓고 지내거든요. 게다가 지난날에는 연탄불을 갈든 아궁이불을 갈든 하는 몫을 어머니가 으레 했지, 아버지가 으레 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집안일이란 쉬는 날이 없습니다. 일요일이라고 밥을 안 먹을 수 있나요. 토요일이나 공휴일이라고 빨래를 쉬어도 되겠습니까. 하루에 딱 여덟 시간만 집일을 하면 되니까 설거지는 안 한다든지 아이는 안 보아도 될는지요.

 

그림책 이야기일 뿐, 우리 삶에서는 얼마든지 다르지 않느냐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라는 책이 아닌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아버지'라는 책이 나오고, "아버지는 힘차게 말했습니다. '좋아, 나한테 맡겨!'" 하고 외칠 수 있으면 얼마나 흐뭇하면서 한결 재미나고 멋질까 하고 곱씹어 봅니다. 그림책 하나로 모든 삶과 꿈을 바랄 수 없을 테지만, 앤서니 브라운 님 그림책 <돼지책> 마무리와 같은 삶을 우리 스스로 일구지 않는다면, 도깨비를 빨아버리든 컴퓨터를 빨아버리든 고양이를 빨아버리든 시원하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한테 스며들기란 어려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 그림책 이야기는 참으로 시원하고 정갈합니다. 제아무리 이 땅 사내들이 더욱 아름다우며 알찬 길을 걷지 못할지라도, 이리하여 이 땅 어머니들이 갖은 집안일을 도맡느라 힘겨운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달지라도, 그림책 어머님처럼 "좋아, 나한테 맡겨!" 하면서 꿋꿋한 마음결과 너그러운 마음씨를 건사하시거든요. 바라기로는 <돼지책>과 같은 마무리이지만, 생각하기로는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는 오늘 우리 어머니들한테 바치는 고마운 인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 또한 언제나 일만 하는 우리 어머니를 둔 까닭에, 처음 제금날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빨래며 밥하기며 쓸고닦기며 제 손으로 합니다. 열예닐곱 해 동안 빨래기계란 한 번도 안 쓰고 오로지 손빨래를 합니다. 손수 밥하고 손수 쓸고닦으며 손수 아이를 봅니다. 종이기저귀 아닌 천기저귀를 씁니다. 아이가 두 돌이 지나고 스물다섯 달째 살고 있는데, 이제까지 기저귀를 몇 만 장 빨았는지 셀 수 없습니다. 뭐, 빨래가 기저귀만 있지 않아요. 이불도 빨고 옷가지도 빨고 하니까요.

 

머잖아 스무 해째 손빨래로 살아온 셈이 되는데, 손빨래를 하면 얼마나 마음닦기가 잘 되고 흐뭇하며 시원한지 모릅니다. 다만, 손빨래를 하면 힘이 들기는 꽤 들고 허리가 아프기는 꽤 아픕니다. 한 시간 남짓 손빨래를 하면 팔과 허리가 저립니다. 뒷목이 뻣뻣해집니다. 날마다 손빨래에 한두 시간이나 두어 시간을 써야 하면 손에 물이 마르지 않아요. 손빨래하는 살림살이는 손빨래로 그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손빨래를 하고 손수 밥하고 아이를 보는 살림살이는 '들이는 품'에 걸맞게 두 손으로 사랑을 느끼고 온몸으로 믿음을 나눕니다. 기계나 돈한테 맡기는 집살림이 아니기에 더더욱 따사롭고 보드랍습니다. 저로서는 이토록 아름답고 즐겁다고 느끼는 손빨래를 기계한테 내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기계를 써서 밭에 씨앗을 심으면 허리가 덜 아프겠으나, 저로서는 손으로 흙에 구멍을 내어 씨앗을 심을 때가 허리는 아프지만 굵은 땀방울과 함께 보람을 느낍니다. 물뿌리개로 약을 치면 풀을 금세 잡는다지만 호미를 들어 풀을 뽑고 캘 때 방울지는 땀과 함께 살아숨쉼을 느낍니다.

 

그나저나, 일본 그림책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에 나오는 도깨비는 우리가 아는 도깨비가 아닙니다(한국 도깨비를 제대로 아는 사람부터 얼마 안 됩니다만). 일본에서 '오니'라고 하는 녀석입니다. 한국에서는 일본책을 옮기며 일본 '오니'를 으레 '도깨비'로 적어 놓는데, 일본하고 한국하고 문화와 삶이 비슷한 데가 많아 이와 같이 적어야 더 낫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일본 오니는 오니입니다. 김치와 기무치가 다르고 된장과 낫토가 다르며 태권도와 가라데가 다릅니다. 더구나 한국 도깨비는 이 그림책에서 나오듯이 뿔 둘에 눈 둘에 팔다리 둘이 아니며, 이 그림책 도깨비처럼 가죽 반바지를 걸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아이들한테 읽히기 좋도록 '도깨비'라는 낱말을 쓰는 일은 얼핏 보기에 괜찮을는지 모릅니다만, 한국과 일본은 닮은 구석이 있는 삶이라 할 수 있어도 같지 않은 삶입니다. 서로 다르고 저마다 다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고 저마다 다른 가운데 모두모두 헤아리고 어깨동무하는 고운 마음바탕을 다스릴 수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책이름에 어쩔 수 없이라도 '도깨비'를 써야 했다면, 책 안쪽에는 참을 밝혀야 합니다. 이 책에서는 '도깨비'라고 적었으나, 이 책에 나오는 도깨비는 도깨비가 아닌 '일본 오니'이며, '한국 도깨비'하고 다른 한편, 한국 도깨비란 어떤 생김새와 모습인가를 아이와 어른 모두 알아보기 좋도록 적어 주어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도깨비를 빨아 버린 우리 엄마

사토 와키코 글.그림, 이영준 옮김, 한림출판사(1991)


태그:#그림책, #그림읽기, #빨래, #책읽기, #삶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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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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