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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것은 사람 마음뿐이 아니다. 우리 동네 슈퍼의 샴푸 가격도 절대로 알 수가 없다. 바코드로 찍어보기 전에는 말이다.

긴 생머리 탓에 우리나라 샴푸소비에 일조를 하는 나, 뒤집어 세워 놓고 뚜껑을 열고 털어보아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샴푸를 사기 위해 2만원을 들고 급하게 슈퍼로 향했다.  때로는 사야할 것을 뒤늦게야 깨닫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물론 사려고 했던 것은 샴푸 하나였다. 하지만 인생이 언제는 계획대로 됐던가. 인터넷 고스톱에서 자신을 먹으라며 팔딱거리는 패를 보듯 작은 움직임을 보이는 과자 몇 개를 집어 들었고 난 샴푸와 과자 몇 개를 들고 당당하게 카운터로 향했다.

그러나 시련은 늘 느닷없다. 샴푸와 과자 몇 개의 가격이 2만원을 훌쩍 넘어버린 것이다. 난 겸허한 표정으로 몇 개의 과자를 빼야했다. 그런 무안함은 누구든 겪어봐야 아는 것이다.

내가 사야 할 물건에 가격이 표시되어 있지 않는다는 것은 참 불편한 일이다. 난 물건을 고를 때 늘 가격을 확인한다. 하지만 샴푸나 과자 어디에도 권장 소비자 가격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난 7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오픈프라이스제도' 즉 제조업자가 권장소비자가격을 붙일 수 없고 최종 판매자가 물건값을 결정하는 이 제도는 아직까지 소비자에게 혼란만을 안겨주는 것이 사실이다.

오픈프라이스제도는 실제 판매가보다 부풀려 소비자가격을 표시한 뒤 할인해 주는 기존의 할인판매의 폐단을 근절시키고 유통업체 간의 경쟁을 촉진시켜 상품가격이 전반적으로 낮아져 소비자에게 이득이 될 거라는 기대 아래에서 탄생했다.

소비자 훈련 시키는 오픈 프라이스 제도

과연 그럴까. 대량의 장을 볼 때도 마찬가지며 이렇게 낱개로 뭔가를 사야할 경우에도 내가 사고자 하는 물건과 갖고 있는 돈이 맞지 않으면 소비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가격 표시가 잘 돼어 있지 않은 슈퍼에 가게 되면 내 돈으로 내가 필요한 물건을 당당하게 사는 것임에도 가격을 모르면 이렇듯 허둥대야 하는 것이다.

우리 동네 슈퍼에는 아직 '50%세일'이라고 적혀있는 아이스크림이 있다. 그런데 오픈프라이스제도가 시행되면서부터 아이스크림 가격이 올랐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원가가 올랐고 오른 가격에서 반 가격 세일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원가를 알 수 없으니 얼마가 오른 것인지, 얼마를 싸게 사는지 알 수 없고 결국 가격이 예전에 비해 올랐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장을 봐야 하는 것일까. 원가를 알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판매자가 결정한 물건 값을 비교하라는 말인가. 샴푸 하나라도 싸게 사려거든 동네의 마트를 모두 다녀보라는 말이다. 신종 소비자 훈련이다.

권장소비자가격이 적혀있지 않은 물건들을 보고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물건 값은 알 거 없다? 값이 얼마건 필요하면 사고 아니면 말라 이건가?' 누구나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물건인가를 생각하고 그 다음으로는 가격을 알아 볼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금액인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마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살 물건 값을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이 줄 서있는 계산대 앞에서 일일이 바코드를 찍어 가격을 알아봐 달라고 하지 못한다. 비싸도 필요하니까 사고 마는 것이다.

물론 냉장고나 컴퓨터와 같이 가격이 비싼 전자제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상가의 가격이 제일 싼지 사전에 알아보고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녁 반찬이나 아이들의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어떻게 동네를 일일이 돌며 가격비교를 할 수 있을까.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주 이용하던 슈퍼를 믿고 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픈 프라이스 제도는 정말 소비자를 위한 것일까

소비자가 부딪히는 문제는 또 있다. 같은 제품의 가격 차이야 상점끼리 확인할 수 있다지만 각각 다른 회사의 같은 상품을 가격 비교할 때 소비자는 영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례로 샴푸 하나를 고를 때도 진열대에는 여러 회사의 제품이 진열돼 있고 소비자가 일일이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찍어 가격을 알아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를 위한다는 제도는 결국 가격을 몰라도 무작정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오픈 프라이스 제도는 유통업체들의 가격경쟁을 유도하여 소비자들에게 싼값으로 물건을 제공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소비자가 일단 가격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소비자를 위한 정책이 정작 소비자를 불편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돈이 정말 많아서 가격을 묻지 않고도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가진 자'가 아닌 이상 일반 소시민에게는 불편함을 감수하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가격을 보고 물건을 살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 골라 살 수 있는 권리는 이미 물 건너 간 것이다. 

어느 상점이 어떤 물건을 싸게 파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물건을 살 때의 가격을 판단하는 기준이 오히려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일부는 스마트 폰을 이용해 바코드를 찍어 가격을 알아보고 산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물건 값이 더 싼 곳을 알아보기 위해 스마트 폰을 구입해야 한다는 말인가.

지금도 슈퍼에서 장을 보면 몇 만원이 훌쩍 넘는다. 물가가 오른 탓이다. 거기다 권장소비자 가격이 없어 돈을 얼마나 가져가야 할지 모르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동네 슈퍼를 갈 때도 카드결제를 하고 있다.

오픈 프라이스제도라는 어려운 말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비자를 위한다는 이 제도의 의도대로 싼 가격에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동네의 모든 슈퍼를 다니며 일일이 가격을 비교해 보고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또한 오픈프라이스제도가 의도한대로 유통업체 간 가격 경쟁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제조업체들에게 압력이 가해진다면 제조단가를 낮추기 위해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피해는 소비자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진심으로 소비자를 위한다면 대다수의 소비자가 불편함을 겪지 않고 싼 가격에 좋은 제품을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우선이 돼야 할 것이다.


#오픈프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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