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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한국 주요 언론들은 '보수' 이데올로기에 모든 것을 걸어버린 듯 뵌다. 권력 담당자가 '보수' 쪽 사람이라서 그들 주장은 가속이 붙고 일사천리로 저자 거리에 넘쳐난다. 지난 6·2 지방선거가 보수 쪽 일방 승리로 끝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보수 쪽 사람들은 이른바 '김대중-노무현 시대'를 '잃어버린 10년'이라 하며, 이들 두 정권을 진보정권이라 즐겨 부른다. 거기에 실패라는 딱지를 붙여버리고, 보수 쪽에 희망이 있다 강변한다. 그래 보수 이데올로기가 넘쳐나는 시대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언론들이 우리 시대는 이데올로기 시대가 아니라고 '즐거이' 규정한다는 점이다. 맞다. 어느 시대건 이데올로기에 끌려 다니던 때는 불운한 때라 할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니 말이다.

 

다만 저들 언론이 얘기하는 데 불순한 의도가 들어있다는 게 문제다. 저들은 끝없이 탈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면서 사실은 '진보'의 실패라는 이미지를 대중에게 심어주려 한다. 동시에 보수 또는 보수주의 전도사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이러한 때 영원한 '자유주의자' 이사야 벌린을 읽는 덴 또 다른 맛이 있다. 1953년 이사야가 쓴 <고슴도치와 여우(부제:An Essay on Tolstoy's View of History)>라는 책에서 다시 나는 그를 만나보았다. 톨스토이의 역사 이해 속에서 톨스토이의 정치적 좌표를 찾아보려고 이사야는 이 책을 썼다.

 

그가 이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톨스토이는 정치 개혁을 거부했다. 근본적인 쇄신은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내면의 삶은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대중의 마음속에만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135 쪽)." 이는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하다. 자신의 자유주의적 정치 지향을,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빌어, 이해의 폭을 넓히려 든 것이다.

 

1950년대 영국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이 패배하고, 그에 이어 노동당이 집권하는 상황을 맞는다. 여기서 몇몇 좌파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희망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이를 위해 전진적인 프로그램을 내지 못하던 노동당과 공산당의 무능함이 냉전 격화와 중첩되면서 그 희망은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사야는 영국으로 이주하기 훨씬 전 러시아 혁명을 보며 충격을 받으면서 자신의 정치 지향을 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서는 어떤 가능성도 찾을 수 없다고 그는 여겼던 것 같다. 대신 개인의 창의성이나 자발성, 내면 삶의 가치를 무엇보다 우선으로 여겼다.

 

고슴도치와 여우는 이사야의 인간 이해, 정치적 지향과 삶의 방식 이해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고슴도치 형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고, 여우 형 사람들은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사야는, 톨스토이를 "본래 여우였지만 자신을 스스로 고슴도치라 믿었다고 가정해 보려" 한다. 톨스토이의 역사 이해가 자신의 시각에 상당히 근접해 있음을 적극적으로 내보이려 한 것이다. 

 

이사야는, 톨스토이가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을 두고, "자신이 정한 역사 철학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 그런 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싶은 욕구 때문"이라 한다(43쪽). 톨스토이는, 실체가 없고 추상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는, 진실을 발견하려 했고(60쪽), 영웅중심적 역사론을 거부했으며, 과학적 사회학이 발견한 역사의 법칙도 거부했다고 이사야는 보았다(69쪽). 여기에서 이사야의 자유주의적 세계관과 역사관이 드러난다. 톨스토이의 역사 이해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사야의 유물론자 비판은 한층 더 가혹하다. "그들은 개인적 영혼 밖에 위치하는 하찮은 것들, 가령 사회적이고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현실을 진실한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었다(58 쪽)." 유물론자들은 삶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들을 모르고 있다고도 비판했다. "삶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들은 개인의 경험 개인의 사사로운 관계, 색깔, 냄새와 맛, 소리와 움직임, 질투와 사랑과 증오, 열정, 순간적으로 떠오른 혜안, 끊임없이 변하는 순간들, 일상의 나날들, 이런 모든 것이다(58-59쪽)."

 

  러시아 좌파 지식인들은 톨스토이의 '사회적 무관심'을 공격했다고 하면서도, 이사야는 카레예프의 평가를 인용하여, "순진한 역사학자들이 가정하듯 역사가 '힘'과 '정신활동'이란 막연한 단위들의 조합이라는 데 반발했다는 점에서 톨스토이는 옳았다." 했다(81 쪽). 그는, 톨스토이가 18세기와 19세기의 허약한 역사철학을 단호히 거부하려 했다고도 이야기한다(88쪽). 

 

  이사야는 과학적 역사이론에 대해서도 거듭 거세게 비판한다(102쪽). 과학적 방법론에 대해서도 톨스토이가 신랄하게 회의하였다고 이사야는 전한다(125 쪽). 합리적 수단, 훌륭한 법의 시행, 과학적 지식의 확신 등을 통해서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주장에 냉소적이었다(133 쪽),고도 이사야는 쓰고 있다.

 

 이사야가 톨스토이와 전쟁과 평화를 탐색하면서 찾아낸 톨스토이의 역사관이나 정치 지향은 분명히 이사야의 주장과 가까운 면이 있다. 톨스토이나 이사야 모두 인간에 대해 비관적이라는 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들 '사람들'이 내세우고 있는 역사철학이나 사상, 제도나 정치적 주의·주장 등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결국 희망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에서 기대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톨스토이 눈에는, 기계적 유물론은 융통성이 없으며, 개인 내면의 변화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을 목격한 이사야는, '과학'을 표방한 사회주의가 혁명 시기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음을 생생히 보았을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정치 지향은 그들이 처한 시대 상황이나 시대정신과 잇닿아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사야가 개인 '내면'이나 지혜(149 쪽)에서 새로운 실마리를 찾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필연적인 추세'나 '이해할 수 없는 것' '세상사가 전개되는 방법'에 얽매이지 않고 '환경을 대략적으로  짐작하는 특별한 감각으로서 '지혜'를 내세우고 있다.

 

지혜란 무엇인가? "어떤 불변의 조건에서 변화시킬 수도 없고 완전히 표현하고 예측할 수도 없는 요인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역량" "삶을 살아가는 법을 아는 힘(150 쪽)"이라고 이사야는 정의한다. 

 

이사야는 또한 통찰력을 이야기하는데, "톨스토이의 결정론과 현실주의, 염세적인 세계관, 과학과 세계 속 상식이 이성에 부여한 확신에 대한 경멸을 있게 한 근원"이라고 이사야는 진단했다.

 

그렇다고 하여 톨스토이가, 이사야가 찾고자 하는 '약속의 땅'에 다다른 건 아니라고 이사야는 말한다. "요컨대 예술, 과학, 문명, 합리적 비판으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166 쪽)" 게 바로 그 땅이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톨스토이와 러시아 혁명을 목격한 이사야 벌린을 우리는 '자유주의자'의 반열에 넣을 수 있을까? 이사야는 톨스토이를 자유주의자로 분류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사야의 주장하듯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쪽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유주의 쪽 사람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톨스토이는 이데올로기 과잉시대에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 사랑하는 일에 몰두했던 감상적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그는 치밀하고 과학적인 이론을 세우지도, 그런 이론을 비판하려 골몰한 적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사랑하는 일에 집중했고, 문학을 통해 이를 실천하려 했다. 그는, 이사야 벌린처럼 시온주의자도 반공주의자도 아니었다. 톨스토이는 이사야처럼 자기중심적인 시온주의에 빠진 적도, 반공주의자 성향을 보인 적도 없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욱 철저히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을 탐색하다 세상을 떠났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사야 벌린의 이야기 가운데 우리는 그가, 개인의 일상사가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건져올릴 수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 상황에서는 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책을 낸 지 벌써 반세기가 흐른 지금 그의 생각에 우리가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개인의 소박한 일상사, 개인 '내면' 생활, 내면의 자유가 소중하다는 걸 부정할 사람들은 없다. 그러나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개인들이 개인의 일상사나 내면 생활을 공동체 전체의 문제와 따로 떼어서 생각하고 지속해나갈 수 있을까. '보수' 이데올로기가 넘쳐나는 시대에 개인의 삶의 질이라는 문제를 떠올리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이데올로기의 과잉, 진보냐 보수냐, 역사 이해나 정치 지향이 어떤 것이냐를 따져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무수한 개인들의 소박한 일상을, 사회적 삶이나 공동체 삶 속에서 어떻게 방해받지 않고 건강하게 유지하게 하느냐가 문제가. 그걸 가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문제다. 보수 이데올로기, 감정적 '반북' 이데올로기가 무비판적으로 퍼뜨려지는 시대에,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틀을 우리가 냉정하고도 지속적으로 지닐 수 있다면 우리는 비관적인 게 아니다. '보수' 이데올로기나 감정적 애국주의에(서) '자유로운' 또는 '얽매이지 않는' 자유주의자를 꿈꿀 수 있다면, 우리가 소박한 일상을 바란다 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붙임] 이사야 벌린, (강주헌 옮김,) 고슴도치와 여우,  서울:애플북스, 2010

 

 


고슴도치와 여우 - 우리는 톨스토이를 무엇이라 부르는가

이사야 벌린 지음, 강주헌 옮김, 애플북스(2010)


태그:#보수주의 이데올로기, #광신적 애국주의, #감정적 반북주의, #개인의 일상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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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이 사물을 올바로 담아낼 때까지, 사물들을 올바로 이끌어 낼 때까지 말과 처절하게 대면하려 한다. 말과 싸워서, 세상과 싸워서, 자신과 싸워서 지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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