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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호우시절은 언제야?"

친하게 지내는 선배형이 이전에 술자리에서 나에게 던졌던 질문이다.

"호우시절이 뭐예요?"

영화 <호우시절>을 보지 못했던 나는 무식하게도 이렇게 되묻고 말았다. 호우시절은 인생에서 좋았던 때, 기뻤던 때를 의미한다고 형이 알려주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살아오면서 언제 나는 기쁘고 즐거웠더라?

"아마도 혼자 여행했을 때겠죠."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혼자서 여행하며 행복했던 그 시간들을 떠올렸다. 혼자서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평원을 걷고, 마다가스카르의 숲 속을 헤치며 하염없이 인도양을 바라보던 그 시간들을.

혼자 떠나는 여행의 장단점

마다가스카르 바오밥나무
마다가스카르바오밥나무 ⓒ 김준희

"왜 혼자 여행해?"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왜 결혼 안 해?"라는 질문처럼, 이런 질문에도 명확한 답은 없다. 굳이 답하자면 '혼자인 게 편안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며칠간의 패키지 여행이라면 몰라도, 몇 달 동안의 배낭여행이라면 자기 옆에 누가 있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변해갈 수 있다. 친구라도 예외는 아니다. 30년 넘게 결혼생활을 했던 노부부가 함께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1년 만에 이혼했다던가. '당신이 이런 인간인지 몰랐다' 서로 이런 말을 하면서.

혼자 떠나는 여행의 최고 장점은 외로움과 함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서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다. 함께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면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혼자하는 여행은 참 이기적인 여행이다.

단점도 있다. 낯선 곳에서 혼자가 된다는 것이 단점이다. 자신이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 책임도 고스란히 떠맡아야 한다. 위험이 닥쳐도 홀로 거기에 맞서야 한다. 평소에도 혼자서 밥 먹고 술 마시고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한국에서도 나는 혼자서 밥 먹는 일에 익숙하고 가끔 혼자서 술 마실 때도 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상관없지만 낯선 곳에서 혼자서 잠드는 것은 상대적으로 덜 익숙하다. 여행하면서도 잠자리에서 가슴이 철렁했던 경우가 몇 번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문에 잠금장치가 없는 방에서 잘 때였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문을 쳐다보자 방문 앞에서 누군가 유리창을 통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보자 그의 실루엣은 조용히 옆으로 사라져갔다. 그 순간 어찌나 놀랐던지.

두려움 속의 사막 야영

마다가스카르 이살로 국립공원
마다가스카르이살로 국립공원 ⓒ 김준희


키질쿰 사막 지평선까지 뻗어있는 포장도로
키질쿰 사막지평선까지 뻗어있는 포장도로 ⓒ 김준희

야생동물의 천국인 마다가스카르에서는 동물이 문제였다. 잠을 자다가 새벽에 문득 눈을 떴을 때, 내 머리맡에는 10개가 넘는 다리가 달려 있는,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한 절지동물이 한 마리 있었다. 기겁을 한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고 그 녀석도 나한테 기겁을 했는지 엄청난 속도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말할 것도 없이 그날 밤은 잠을 설쳤다.

최고의 밤은 중앙아시아 키질쿰 사막에서 혼자 야영했을 때였다. 하루종일 걸었지만 잠 잘 곳은 보이지 않고 눈 앞에는 사막과 그 가운데로 뚫린 포장도로뿐. 나는 야영을 결심하고 도로 바깥 쪽에 1인용 텐트를 쳤다. 해가 지고 텐트 안에 누으면 바로 잠이 올 줄 알았다. 종일 40km 가까이 걸었으니 당연히 피곤하지 않을까.

잠 대신에 몰려온 것은 걱정과 두려움이었다. 포장도로에는 밤에도 간간이 차량들이 오고 간다. 운전사가 혹시라도 졸다가 차량이 도로를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대형트럭이 이 텐트로 돌진해오면 어떡하지? 그 육중한 타이어가 내 배를 밟고 지나간다면?

다른 걱정도 생겨났다. 여기는 사막이다. 사막에는 전갈도 있도 뱀과 독거미도 있다. 그 동물들이 이 얇은 텐트를 뚫고 들어오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잠든 사이에 전갈이 들어와서 날 공격하면 어떡하지? 뱀이 독 이빨을 내 근육에 박아넣으면? 독거미가 내 몸을 물어뜯으면?

잠은 순식간에 달아났다. 밖에서 조금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도 온 몸이 바짝 긴장된다. 저 소리의 정체는 무얼까. 아까 나에게 달려들었던 개가 여기까지 따라왔나. 보드카에 취한 현지인이 이 텐트를 공격 목표로 정했을까. 아니면 사막의 괴생명체가 다가오는 걸까.

다시 호우시절을 꿈꾸며

키질쿰 사막 1인용 텐트에서 혼자 야영을 한다.
키질쿰 사막1인용 텐트에서 혼자 야영을 한다. ⓒ 김준희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별로 두려울 것도 없었다. 트럭이 텐트로 돌진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도로 주변이라서 사막의 야생동물이 여기까지 나올 일도 없다. 보드카에 절은 현지인이 사막의 밤에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본능과 감정은 이성을 억누르고 계속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막이고 나는 혼자라고, 그림 같은 사막이 아니라 치명적인 동물들이 있는 황무지라고, 아차하면 다칠 수 있으니까 정신 차려야 한다고, 여기는 나의 홈그라운드가 아니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낭만적인 사막의 밤을 상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결국 자다깨다 하면서 그날 밤을 보냈다. 아침에 해가 뜨는 것이 반가웠고 몸은 피곤했지만 사막에서 무사히 야영을 했기에 마음은 가벼웠다. 다른 누구와 함께 야영을 했다면 어땠을까. 위험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적어도 혼자서 불안에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혼자서 여행을 하려면 이런 불안과 두려움도 감수해야 한다. 사막에서 완벽하게 혼자가 됐던 그날 낮과 밤, 혼자하는 여행의 장단점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언제 어디로 떠날지 모르겠지만 그때도 나는 혼자일 가능성이 많다. 혼자서 길을 걷고 경치를 바라보며 오만가지 생각과 상상을 할 것이다. 다시 한번 다가올 그 호우시절이 기다려진다.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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