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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와 양혜왕은 <양혜왕 상> 편에서 정확히 3합(合)을 겨룬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2합(合)은 맹자의 일방적인 게임. 양혜왕으로서는 어렵게 주선한 자리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끝낼 수는 없는 노릇. 늘 그렇듯이 솔직함이나 직선은 때론 아주 강한 무기가 된다. 양혜왕은 자신의 진심(盡心)을 열어 보이며 바짝 다가앉는다.

"나는 백성과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왜 이웃나라만큼 백성이 늘지 않는 것인가요(察隣國之政無如寡人之用心者隣國之民不加少寡人之民不加多何也)?" 다른 제후들에 비해서 딴에는 한다고 하는 그로서 이 대목은 정말 미칠 노릇인 것.

察隣國之政無如寡人之用心者隣國之民不加少寡人之民不加多何也
살피다는 의미의 동사 찰(察)이 나왔으니 목적어가 있어야겠다. 무엇을 살핀다는 것인가? 이웃나라의 정치(隣國之政)를 살펴보는 것이므로 여기서 문장을 끊어준다. 없다는 동사 무(無)가 있다. 무엇이 없다는 것인가?  뒤에 보니 사람을 나타내는 자(者)가 보인다. 여(如)는 비교, 과인(寡人)은 자신의 겸사, 정리하면 과인(내가)이 마음 쓰는 만큼 하는 자가 없는데. 다음은 주어가 좀 길다. 이웃나라의 백성(隣國之民). 동사는 줄어든다는 의미의 소(少), 마찬가지로 과인의 백성(寡人之民)이 다시 주어가 되고 동사는 늘어난다는 다(多). 이 문장 역시 대칭으로 매우 간결하며 그래서 상쾌하다. 또한 문장 끝의 어찌된 일인가요(何也)라는 질문은 양혜왕의 고민을 함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정리하면 察隣國之政, 無如寡人之用心者. 隣國之民不加少, 寡人之民不加多, 何也?

맹자는 어린애 투정 같은 하소연에 어이가 없지만 침착하다.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제가 전쟁으로 비유해볼까요? 맹자가 슬쩍 양혜왕의 아픈 곳(양혜왕은 서쪽으로는 진(秦)나라에 밀려서 수도를 대량(大梁)으로 옮기고 동쪽 제(齊)나라와의 전쟁에게 태자(太子)인 아들을 잃었다)을 찔러가며 말문을 열어가니, 말하자면 격장지계(激將之計).

단병(短兵)으로 접전(接戰)하다가 두 병사가 두려워 물러섰는데 오십 보 도망간 병사가 백 보 도망간 병사를 돌아보며 비웃는다면 어떻습니까? 숱한 전쟁을 무릅썼던, 거기서 온갖 쓴맛을 봤던 양혜왕은 맹자의 예상대로 이 질문에서 그만 울컥 하고 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오십 보든 백보든 똑같이 잡아 죽여야 할 놈들일 뿐(不可直不百步耳是亦走也). 핏대를 세우며 양혜왕은 맹자가 던져준 미끼를 덥석 물었다. 맹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아챈다.

不可直不百步耳是亦走也
이 대목은 매우 재미있는 표현들이 알차게 숨어있다. 동사를 찾아보자. 먼저 가능하다는 가(可)가 보인다. 안된다. 따라서 불가(不可)에서 끊어준다. 직(直)은 여기서 '곧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이라는 부사로 사용되었다. 끝에 ~일 뿐이라는 종결어미 이(耳)와 합쳐서 다만 ~일 뿐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시(是)는 고문(古文)에서는 전부 지시대명사.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우리가 흔히 고문(古文)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읽을 땐 이것이라는 지시대명사로 보면 될 듯. 정리하면 不可, 直不百步耳 是亦走也,(불가하다. 다만 백 보가 아닐 뿐, 이것 역시 도망한 것이다.)

왕께서 만약 이것을 아신다면, 이웃나라보다 백성이 더 늘어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王如知此則無望民之多於隣國也). 무슨 말인가? 전쟁 중에 도망한 병사와 지금 나의 고민이 무슨 상관이며 더군다나 이웃나라보다 백성이 더 늘지 않는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마 양혜왕은 이 대목에서 머릿속이 순간 아득해지지 않았을까? 자신이 맹자의 의도대로 말려들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당신(양혜왕)은 둥둥 북소리가 울리고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기 시작하자 겁에 질려 오십 보를 도망한 겁쟁이 병사이며 자기보다 더 멀리 도망한 자를 비겁하다고 비웃는 병사. 동시에 올바른 정치로부터 오십 보를 달아난 주제에 백 보를 달아난 이웃나라와 견주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것.

말하자면 전쟁 중에 오십 보를 도망한 병사가 백 보를 도망한 병사를 보고 겁쟁이라고 비웃는 것이 웃긴 노릇이듯이 당신이 최선을 다하는데도 이웃나라와 견주어서 백성이 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일은 가소로운 일이라는 말이다. 심하지 않은가? 두 사람의 스케일의 차이가.

맹자와 양혜왕과의 대화는 장구(長久)한 시간을 건너뛰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생동감이 넘친다. 양혜왕의 번민과 그로 인한 복잡한 속내, 이에 대비되는 너무나 선명한 맹자의 논리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적절한 비유로 즐겨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이다.

'오십 보 백 보'의 비유로 다시 한번 양혜왕은 공황상태. 이어지는 맹자의 논변. 가혹하리만치 상대를 끝까지 몰아붙이던 전과는 달리 맹자는 이 대목에서는 친절하고도 상세하게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시작과 끝을 이야기 해준다. 내용을 읽어보면 유가(儒家)라는 기존의 통념을 넘는, 매우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보통 유가(儒家)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고루(固陋) 혹은 관념(觀念)이라는 인상은 이 대목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 맹자는 놀랍게도 정신(情神)이나 신념(信念)이 아니라 물질(物質)에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시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시작과 끝은 모두가 물질(物質)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 개인적으로 이 대목에서 맹자라는 인물에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매료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흔히 말하는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思無邪) 말, 옛사람들이 참으로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가면서 그 사람들의 말이 단지 머리를 울리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슴을 무겁게 울리고 빠져나간다는 것을 느껴갈 즈음 나는 그렇게 맹자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해 전, 그 무덥던 여름날 오후, 온 몸에 와락 끼치던 소름과 더불어 남아있는 기억.

물질(物質)에 기반을 둔 매우 탁월한 현실인식이 바탕이 되었기에 그 연장선에서 항산(恒産)이라는 유명한 개념이 도출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물질(物質)에 기반을 둔 논리이기에 장구한 시간을 건너뛴 오늘날에도 맹자의 논리는 여전히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는 것. 이것이 그 해 여름, 온몸에 끼치던 전율(戰慄)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맹자는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왜 백성이 이웃나라보다 늘지 않는 것인가라는 양혜왕의 질문에 대한 최후의 변론을 또 하나의 통렬한 비유로 마감한다.

개나 돼지가 사람이 먹을 것을 먹어치워도 단속할 줄 모르고, 길에 굶어죽은 송장이 널려있어도 창고 문을 열지 않아서 사람이 죽으면 말하길 나(왕) 때문이 아니라 흉년 탓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을 찔러서 죽여 놓고 말하길 내 탓이 아니라 병기(兵器) 탓이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왕이 흉년 탓을 하지 않는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여기로 몰려들 것입니다(狗彘食人食而不知檢, 塗有餓莩而不知發. 人死, 則曰, 非我也, 歲也. 是何異於刺人而殺之, 曰, 非我也, 兵也. 王無罪歲, 斯天下之民至焉).

예나 지금이나 좋은 나라를 만들기는 쉽다. 그런데도 우린 단 한번도 그런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다. 놀랍지 않은가? 커다랗게 입을 벌린 크레바스 혹은 간극(間隙). 가끔 나는 그 속이 궁금해진다.


#맹자#양혜왕#오십보 백보#대량#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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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아들이며 누구들의 아빠. 학생이면서 가르치는 사람. 걷다가 생각하고 다시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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