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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권력의 역사나 왕조의 역사, 전쟁사나 경제사를 역사의 전부로 알고 역사를 배워온 세대에게 문화사나 일상생활사는 아직도 낯선 분야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Jacob Christoph Burckhardt, 1818-1897) 이래로 역사가들이 정치사 중심의 역사서술 방식에서 문화사, 사회사, 일상생활사로 역사의 지평을 점차 넓혀간 것은 혁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우리가 전쟁이나 정치/경제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를 이해한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할 것인가. 우리가 우리 삶의 깊이와 폭을 얼마나 제한하여 버릴 것인가. 사회문화사나 일상생활사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건, 거대한 역사에서 흔히 대수롭지 않게 다루어 온 개인들의 존재 가치와 그들의 일상을 그만큼 중히 여기게 된 것으로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를 쓴 예니 에르펜베크의 시각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하다.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견뎌온 메르키슈 호수 옆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그는 전해주려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앞으로 그곳에 머무르거나 머무르다 사라질, 수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견디게 될 메르키슈 호수 옆 땅이라는 존재 자체가 또한 의미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려 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사라진 땅, 인간이 사라진 세계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갖는 것도 좋지 않으냐고 말이다.

 

예니는 소설에서 메르키슈 호수 옆을 거쳐 간 여러 사람들의 '삶 이야기'들을 담아놓았다. 정치적인 이유로 자신이 지은 집에 떠나야 했던 건축가, 나치 치하 유대인 박해로 이산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섬유 업자의 가족들, 러시아로 망명하여 고향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작가, 독일군에게 가족이 학살당한 러시아군 장교. 폴란드로 이주했다가 전후에 손자들을 이끌고 빈 몸으로 떠나야만 했던 여인. 자신의 집에서 불법점유자가 되어버린 여인….

 

이들의 아픈 상처들이 권력과 어떤 식으로 연관돼 있다는 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예니는, 정치적 혼란기, 정치권력과 그 하수인인 관료들과 제도의 야만적 횡포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이 소박하게 이어가는 일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루트비히는 이렇게 나무들이 바람에 우수수하는 소리를 유난히 사랑해서(....), 안나와 아이들과 함께 두꺼운 껍질로 뒤덮인 이들 거대한 나무 그들에 앉아 휴식을 취하곤 한다. 바람이 수백만 수천만 개의 은백색 잎사귀들을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소리, 오직 그 소리를 듣기 위하여(75쪽)."

 

"눈을 뜨고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으리라. 수영을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다리가 물속에서 희미하게 어른거리며, 얕은 물을 지나 해안을 향해 첨벙인다. 그 다리를 간질이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소녀를 즐겁게 해 주려고 일부러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 대면서 까르르거리는데, 물속에서 둔중하게 울리는 그 웃음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으리라(134)."

 

이렇게 아름다운 일상을 이어가야 할 개인들의 삶을 권력이 개입하여 가차 없이 파괴하고 끊어버린다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일인가. 오로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낸 소설 속 작가가 타자기로 "독일은 야만을 벗고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고향은 다시 고향이 되어야 한다(168)"고 썼다고 예니는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는 예니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 작가는 "고향의 의미가 더 이상 땅이 아니라 인간 자체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그녀에게, 향수라는 형태의 절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170)"라고도 썼다고 예니는 말한다.

 

모든 권력은 스스로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에 관심을 가질 뿐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데에는 무력하다. 그렇다면 반인륜적이고 야만적인 권력이나 국가가 어떻게 자연인들을 유린하는가.

 

"그는 사라졌던 자동차도로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 난생처음으로 히틀러에게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218)."

"그녀와 언니는, 어딘지 모르는 큰 산에서 내려온 피난민 행렬에 섞여 마을로 들어왔으며, 서로 다른 마을에서 각자 다른 양부모 밑에서 살게 된 것이라고 친구는 말했다(221)."

"신원기록서가 죽는 날까지 따라다닐 테니 앞으로도 희망을 갖기는 다 틀린 일이다(225)."

 

권력은 인간의 마음 저 깊은 곳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며 그 영향은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가 닿는다. 그것은 함께 모여 살아야 할 가족들까지도 나누어버리며, 생래적으로 고통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의 가능성까지도 박탈해버린다. 그래 우리는 권력은 부패할수록 비도덕적일수록 꼭 그만큼이나 야만적이고 반인륜적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생로병사의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권력이나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의 개입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천부인권이나 자기결정권을 지니고 세상에 태어났다는, '거룩하고도 고귀한' 개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비극이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도처에서 인간은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고 루소가 갈파한 것도 그 때문이다.

 

더더욱 슬픈 것은 그런 개인들, 인민(人民)들의 삶이 끝없이 권력이나 국가에 의해 그 존엄성이 파괴되고 존재의 의의가 흔들리고 위협 받으면서도 마치 숙명처럼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니 에르펜베크는 이 소설에서 어쩌면 개인들의 슬픈 일상생활과 아픈 역사를 작정하고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듯하다.

 

개인들의 아픈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개인들의 역사가 얼마나 소중한 역사인가를 보여주려는 듯하다. 개인들의, '아픈' 일상생활사가 권력의 이동에 초점을 두어온 정치사나 돈의 흐름을 따라가는 경제사보다 얼마나 더 가치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려는 듯하다.

 

예니의 소설 속 개인들의 일상생활과 그들의 역사를 읽어 내려가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와 우리와 이웃하는 개인들의 일상생활과 그 역사를 천천히 읽어내려 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장면들이 권력과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를 곰곰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네 개인들의 역사를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한 역사로 써 내려갈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해 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일 것이다.

 

예니 에르펜베크, 배수아 옮김,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서울:을유문화사, 2010

첨부파일
그곳.jpg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배수아 옮김, 을유문화사(2010)


태그:# 일상생활사, #개인의 역사, #문화사 , #사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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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이 사물을 올바로 담아낼 때까지, 사물들을 올바로 이끌어 낼 때까지 말과 처절하게 대면하려 한다. 말과 싸워서, 세상과 싸워서, 자신과 싸워서 지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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